하나된 마음으로 집중·통일되는 경지
지혜에 의해 주체적으로 실증 가능
세존께서 모든 보살들을 부처님의 사자빈신삼매에 들게 하기 위해서 놓는 보조삼세법계문(普照三世法界門)이라고 하는 큰 광명에 의해 나타난 부처님 경계를 본 보살대중은 부처님의 깊은 삼매와 큰 신통력을 볼 수 있었다. 이 보살들도 또한 모든 중생들에게 알맞은 불법을 보이며 끊임없이 교화하였다. 그들은 과거에 부처님들이 계신 데서 선근을 심었거나 비로자나불이 과거에 교화하여 성숙하게 한 이들이기 때문에 여래의 부사의한 깊은 삼매와 온 법계 허공계의 대 신통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법계품에서는 불가설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부처님의 신통 변화의 바다의 방편문을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내용으로 설하고 있다. ① 법신에 들어감 ② 육신에 들어감 ③ 옛적에 성취한 행에 들어감 ④ 원만한 여러 바라밀다에 들어감 ⑤ 장엄하고 청정한 행에 들어감 ⑥ 보살의 지위에 들어감 ⑦ 정각을 이루는 힘에 들어감 ⑧ 부처님이 머무는 삼매와 차별이 없는 큰 신통변화의 바다에 들어감 ⑨ 여래의 힘과 두려움 없는 지혜에 들어감 ⑩ 부처님의 걸림 없는 변재(辯才) 바다에 들어감
이러한 열 가지의 부처님 신통변화의 바다의 방편문에 보살들은 갖가지의 이해·도(道)·문(門)·들어감·이치·지혜·방편·삼매 등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입법계품에서는 특히 법계를 두루 장엄하는 삼매·여래의 경계에 들어가 흔들리지 않는 삼매·모든 부처님의 몸을 두루 나타내는 삼매 등 백 가지 삼매를 설하면서, “보살이 이와 같은 불가설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삼매로써 비로자나여래의 생각생각마다 모든 법계에 가득한 삼매의 신통변화 바다에 들어간다” 설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이것은 분명히 보살의 여러 삼매를 통해서 부처님 경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으로 보살이 삼매를 통해서 부처님 경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우선 부처님의 경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입법계품에서는 부처님의 경계가 지적(知的)인 분별을 초월한, 언어와 생각이 끊어진 경계이므로 부처님의 교설로써 설해지는 것이 아니라 삼매로써 설하여졌다. 사자빈신삼매에 의해 드러난 부처님 세계는 만물이 무한의 상관 관계로써 끊임없이 아름다운 상생(相生)의 생명세계를 펼치는 영원의 세계였다. 일체의 세계에 부처님이 계시고,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끊임없이 신통변화를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여 언제나 자비로운 부처님의 커다란 생명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였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바로 보현(普賢)의 법계로서, 끊임없이 보현행이 펼쳐지는 화엄의 세계이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이러한 대자비의 생명활동 세계를 자기화하도록 하는 가르침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바로 삼매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과 어떠한 객관의 세계가 일치되게 하여, 주관과 객관이 그대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경계를 체득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삼매를 내세우는 것은 부처님 경계라고 하는 것은 과학적이나 객관적으로 실증되는 경계가 아니라, 지혜에 의해 주체적으로 실증될 수 있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삼매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생명의 세계인 부처님 경계를 스스로 직접적으로 파악하도록 하는 내면적인 사고방식이다.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부처님 경계를 직관(直觀)하고, 자기를 잊고 거기에 전심전력해서 몰입하는 삼매를 통해서 부처님의 경계를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체득하여 거기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 십행품(十行品)에서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이 없는 행을 설하는 가운데, “보살은 삼매에 들어 거룩한 법에 머문다”고 하며, 여래현상품에서는 혜등보명(慧燈普明)보살이 “온 법계 안 모든 여래는 온갖 모습을 여의었으나/ 이러한 법을 알기만 하면 세상의 바른 길잡이를 보게 되리라/ 모든 보살의 삼매 중에는 지혜의 빛이 온통 밝아서/ 온갖 부처님의 자재한 근본 성품을 능히 알리라” 설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이라고 하는 말은 보살행을 꽃피워서 부처님을 나타내고, 보살의 만행(萬行)을 닦아서 법계를 장엄한다고 하는 의미다. 이것은 원래 법신인 부처님의 훌륭한 경계를 스스로 체득해서 구현하려고 하는 화엄삼매를 의미하는 것이다. 화엄삼매는 그 세력에 의해 구체적으로는 육바라밀과 같은 보살행을 나타내고, 여러 가지 방편과 신통 변화를 펼쳐서 자유자재하게 여러 가지 부처님의 공덕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삼매에 머무는 사람은 각각 하나의 해탈을 체현해서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를 아름답게 장엄하는 하나의 장엄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대 불교문화학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