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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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생각으로 알려 하기 이전에
직장생활에서 공부방법

저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한시간 반 정도 차 안에서 나름대로 내면을 관하는 공부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로 붐비고 소란스럽지만 그 시간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공부해 나가고 있는데 그게 맞는 공부방법인지요? 그리고 하루 일과시간 중에 사람을 만나고 업무를 보는 과정에서 어떻게 마음공부를 해나가야 하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내면을 관하는데 있어서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몸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간절하게 관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조용한 집에 있다 할지라도 별별 생각이 다 일어난다면 거기를 조용하다고 할 수 없는 거고 아무리 시끄러운 차 안이라 해도 깊이 관하는 마음이 되면 그 차 안은 시끄러운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오분 십분이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내면을 깊이 관했다면 그건 열시간을 앉아있었던 것보다도 의미가 있고 공부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차를 타고 다닐 때나 또 아니면 쉬는 시간 틈틈이 관하는 생활을 해 나가세요. 물론 처음에는 조용할 때가 산만치 않고 좋겠죠. 자기 주장심을 잡을 때까지는 관하는 공부를 그렇게 해 봐야 합니다. 그게 다 잡히면은 시장을 나가든 차 안이든 테레비를 보든 항상 주장자가 잡혀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즉 말하자면 소 고삐를 쥐지 않고 소가 제대로 가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 고삐를 쥐고 단련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항상 소 고삐를 마부가 쥐고 갔지만 이제는 소가 커서 소 고삐를 놔도 소가 그냥 제 갈 길을 잘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정진하는 사람들은 항상 유념하시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을 내가 자주 합니다마는, 이날까지 내가 망했든 흥했든 일체를 내가 해오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내가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자기의 마음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도리를 알고 했을 때하고 모르고 했을 때하고는 천양지차로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 심주라는 자기 자체가 바로 화두가 되고, 그 화두는 항상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고 하는 데에 근본이 있다고 보는 거죠.
각자 본인들이 생활도 하고, 또 생활을 한다고 한다면 모든 것을 이렇게 보고 듣고 하고 생각하고, 또 뭘 또 하고 또 보고 또 생각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은 만나는 대로 내 생각이 그 사람에게 집중이 돼서 그 상황에 맞는 말을 서로 대화를 하고 그러는 것도 자기거든요. 자기가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을 하게 된 동기, 누가 말을 하게 했느냐? 그겁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깐 말을 하게 되죠? 그것이 배울 때는 본래면목 실상이라고 집중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말을 누가 하게 했느냐 하면은 그건 자기 생각이지마는 그 말소리가 나는 거, 자동적으로 움죽거려지는 이런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그 능력은 바로 주인공이다 이겁니다. 자기 본래 나오기 이전의 그 자기 원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로 하여금 생각을 내게 하고 또 보게 하고, 보면은 보는 대로 들이게 하고, 크다 작다를 들이게 하고 “아, 저건 나쁜 거로구나” 하고 들이게 하고 “저건 좋은 거로구나” 하고 들이게 하고, 항상 보면은 안으로 들지 않습니까? 감지가 되는 겁니다. 컴퓨터에 입력을 하면 그대로 다 나오듯이 말입니다.
그렇듯 나의 근본에 입력하는 대로 출력이 돼서 나오는 이 당연한 진리가 부처님 법인데도 그거를 모르고 그냥 허망하게 지내는 사람은, 내가 바로 자아부처며, 본래면목이며,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삼위일체가 돌아가는 거를 가지고 불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자기를 의심하고 못 믿지도 말고 깔보지 마세요. 딴 이름이나 딴 형상은 높이 받들면서 자기를 못 믿는대서야 말이 됩니까?
생활 따로 있고 부처님 따로 있고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생활이 즉 부처님 법이요, 우리 움죽거림이 바로 활용이니까 그대로 실천하면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아니면 잠시 쉴 때라도 장소나 시간을 나누지 말고 매 순간 자기를 지켜보고 관하는 정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일이 됩니다. 자기의 근본을 믿고 일체를 다 거기에 내려놓아야 앞으로 생활하는 데에 좀더 편해질 겁니다.


고소공포증이 심한데…

제가 인제 얼마 있으면 군대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고소공포증이 심합니다. 마음이 심약하고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조금만 높은 데 올라가게 되면 공포감이 심하게 밀려와서 군대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됩니다. 군생활을 하면서 고소공포증에 휩싸이지 않고 저의 주장자를 잃지 않으면서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할 수 있도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곧 군대에 가는 청년인가 본데 한생각을 잘 굴려서 지금부터는 미리 높은 데라는 생각이 들걸랑 그 생각을 내려놓으면 현기증이 나지 않을 거예요. 얕은 데라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럼 옆으로 떨어질 데도 없죠. 그러고 어떤 공포심을 가지지 말고 ‘죽이거나 살리거나 너 알아서 해라’ 하고 맡겨놓으면 높은 데를 올라간 게 아니라 그냥 평평한 소로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바꿀 수 있어요. 그럼 현기증도 안 나고 젊은 패기가 그냥 용솟음치죠. 그렇게 주인공에다 맡겨서 그 패기를 기르도록 하세요. 그렇게 패기가 나오면 기운이 생기죠.
그리고 우리 마음은 본래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다는 걸 알면, 그런 생각을 못하면 얼른 쉽게 말해서, 그냥 덤벙 뛰어 넘지를 못한다 이거지요. 그러니깐 다 놓고 뛰어봐라 이거예요. 앞뒤를 다 놓고 그 가운데 주인공에다 탁 놔버리면 자기 현재 의식이 이러니 저러니 할 게 없어지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내 한생각이면 몸 속에 있는 생명의 그 의식들도 다 한마음으로 따라줘요. 따라주게 만들어야 돼요.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들어오는 줄 모른다면, 주장심을 가지고 자기 주인공을 믿지 않는다면 바로 집에 주인이 없는 거와 같아서 바깥에서 세균이 들어오든 영계가 들어오든 유전성이 들어오든 그건 막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안의 내 집에 주인이 있어야만이 바깥에서 나그네가 와도 “거 누구요?” 하고 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해서 아는 사람이면 들이고 모르는 사람이면 들이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이렇게 해야만이 내 몸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어요. 모든 게 다 그래요.
나로부터 이 세상이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믿을 게 뭐가 있겠어요. 누가 대신 죽어주지도 못해요. 아파주지도 못하고 먹어주지도 못하고 똥눠주지도 못하고 자주지도 못해요. 그러니 누가 있어 대신 해 주겠습니까? 그러니까 현재에 나는 내가 나기 이전 영원한 근본을 안 믿을 수가 없는 거죠. 그 근본으로 인해서 어머니 아버지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데 자기 영혼이 거기 포함됐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구성된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어째 믿지 않겠어요?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을 흘러 오면서 쫓고 쫓기고 진화돼서 이렇게 사람까지 됐는데 자기를 끌고 나온 진짜 자기를 믿지 못한다면 말이 안되죠? 자기를 믿지 못하면 자기 몸뚱이가 벌써 구덩이에 들어가서 일어나지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서 허덕이는 문제들이 한 두건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나의 뿌리, 주인공에서 일체를 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고 열심히 관하도록 하세요. 군대 가서도 무서움증이 일어나거든 미생물에서부터 자기를 이끌고 나온 자기 주인공을 믿고 일체를 그 자리에 맡겨 놓으면 바로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서서히 그런 두려움이 녹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열심히 정진해서 앞으로는 편하게 사세요.


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마음은 체가 없다고 하셨는데요, 산도 마음인데 산이라는 실체가 있지 않습니까? 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냥 말 몇 마디로 알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마음으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이 제각기 벌어진다면, 즉 말하자면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이 제가끔 논다면 거기에 끄달려서 옴짝을 하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으로 다스려서 그걸 하나로 뭉치면 그때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주게 되는데 그때 비로소 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한마음이 되면, 만약에 내가 어디가 아파서 관하게 되면 둘이 아닌 까닭에 분야를 맡은 대로 요소 요소를 진행해 나가면서 모두를 하나로 들어줄 수 있는, 리드하는 마음의 주인이 있어야 모든 중생들도 다 리드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리드해 나갈 수 있어야만이 한마디의 말도 법이 되고, 한 가지의 행도 그대로 법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내 몸속 그 중생들이 내가 마음 내는 데에 따라서 모든 것을 배우고 나가는 데 흡수돼서, 팔자운명이라든가 그런 걸 떠나서 내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때는 다른 의식으로 돌려지니까 바로 화해서 보신으로서 응신으로서 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능히 법신이 되고 응신이 되고 보현신이 되고 부처가 되고, 그 중생들이 다 제도가 돼야 자유자재권을 얻어서 마지막에 내가 천백억화신의 대표로서 성불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와 같이 내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과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의 실체를 말로 알거나 생각으로 알려고 하기 이전에 자기 근본을 발현하는 공부를 일념으로 하시고, 내 마음이 훈련이 그렇게 되고 계발이 되고 과거 자기와 상봉을 해서 자동적으로 작용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스스로 생길 때 지구의 수명도 길게 할 수 있고 태양의 수명도 길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경을 보는 문제에 대해

스님께서는 “글자를 본다면 경전이 나를 보는 거고 글자 아닌 진실된 마음의 원리를 그 안에서 깨닫는다면 내가 진짜 경을 보는 거다. 내가 경을 봐야지 경이 나를 보면 안 된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과거의 조사님들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스님께서는 법화경을 보고 있는 사람한테 “네가 법화를 굴리느냐? 법화가 너를 굴리느냐?” 이런 화두 비슷한 질문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하시는 건지 보되 진실을 보라고 하시는 건지, 아니면은 보면서도 걸리지 말라고 하시는 건지 그것에 대한 자세한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경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경을 보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책을 보면 노냥 그 내용만 달달달 외우려고 들고 다닙니다. 그러고 거기서 뭐가 나오는 줄 알고 그렇게 애를 쓰거든요. 물론 그런 것도 허망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걸 보면은 상식적인 면에서 이익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쪽으로만 너무 밝히고 자기의 내면을 무시하면은 머리만 밝아졌지 지혜가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만 하는 사람한테는 “경을 보지 마라. 너의 내면을 알고 그걸 보면은 바로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또 그렇다고 아예 책을 안 보는 사람한테는 “그러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그러니까 그 도리를 알았으면 봐라.” 이러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한테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경을 보는 놈은 누구고, 경을 안 보고 싶은 놈은 어떤 놈인가. 보기 싫은 것도 그놈이 그러는 거고, 보고 싶은 것도 그놈이 그러는 거고, 앉아 있는 놈도 그놈이요, 누워 있는 놈도 그놈이요, 서있는 놈도 그놈인데 어떤 놈이 그 일체를 다 하는가?” 그러면 그때 가서는 “바로 접니다.” “그럼 됐다. 그러면 저라는 놈이 전부 하는 거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걸 놓고 그냥 함이 없이 해나가도록 해.” 이러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일체를 다 거기다 놓고 하라고 하지만 이것도 말입니다, 일체를 거기에서 다 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그거를 믿게 되면 스스로서 놓을 것도 없고 안 놓을 것도 없이 그냥 놔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때 가서는 책을 보지 마라, 보라는 소리를 굳이 할 것도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 그 말이 필요한 거지 경에 따라서 말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양면이 다 그래요, 마음이든지 경이든지. 그래서 균등하게 잡아라. 균등하게 양면을 다 잡는 게 문제입니다. 나는 균등을 잡는다, 안 잡는다도 없이 그냥 푹 아예 죽었다가 거기에서 다시 살아오니까, 예를 들어 산 것도 없고 그렇지만, 알고 보니까 산 것도 없더라 이거예요. 거기서 보니깐 거기서 다 나오더라 이겁니다, 원리가. 그러니까 나로 봐서는 경을 안 볼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데, 스스로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 싫으면 안 보고 그러는 겁니다. 보고 싶을 때 봐야 그게 또 정면으로 들어가지 보기 싫을 때 아무리 봐야 그 뜻이 하나도 안 옵니다.
그러니까 그저 편안하게, 상황에 따라서 책을 보고 싶을 때는 보고 안 보고 싶을 때는 보지 않고, 뭘 해도 편안할 수 있게끔 마음이 조용히 쉬면 된다 이겁니다. 그대로 삼합이 회전이 되면서 편안하고 잔잔하게, 항상 샘물이 들고나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이 염불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경 속에 부처님의 법문이 있듯이 염불도 타의를 믿게끔 해 놓은 염불이 아닙니다. 그런데 꼭 타의를 붙잡고 하게끔 만들었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것도 옳은 게 뭐냐 하면, 자의를 붙들고 처음부터 나가게 하면 자기는 믿을 바가 없다고 안 믿으니까 바깥에다 찾게끔 해 놓았겠지만 지금 시대에, 모든 것이 발전이 된 이 시대에는 반드시 안으로 붙잡고 나가게 해야 되거든요. 지금 시대에 사는 부처님들은 너무 성숙하고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게끔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첫번에도 나로부터, 두번째도 나로부터, 세번째도 나로부터 귀결을 지어 줘야 된다는 겁니다.


화내지 않아야 하는지?

스님의 가르침 덕택에 분별심과 집착을 놓고 갈 수 있는 법을 이젠 마음으로 체득하며 갈 수 있을 만큼 마음 속에 부동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끔 화가 올라오는 것을 눌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관법으로 마음의 흐름을 지켜보며 놓고 있긴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무루법 속에서 참 성품대로 사는 것이며, 온전하게 놓고 있다면 어떤 경계에도 화내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 것인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바람이 없어도 안되고 구름이 없어도 안됩니다. 그러니깐 구름이 지나가듯 바람이 지나가듯 공기가 있어야 사람이 살듯이, 이렇게 한창 색색가지가 찰나찰나 돌아가야만이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도 형성되고요. 그러니까 항상 낮에는 에너지를 쓰고 밤에는 에너지를 형성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낮에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형성된 에너지가 쓰여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바뀌어지니까, 바뀌어지지 않으면 못 살아요. 하나서부터 열까지 때로는 이런 게 닥치고 때로는 저런 게 닥치고, 때로는 이 소리를 듣고 때로는 저 소리를 듣고, 이걸 만나면 저걸 만나면서 바뀌어 지듯이 전부 순간순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참나를 발견하는 문제도 성을 내든 성을 안 내든, 환희심이 나든 환희심이 안 나든 무조건 거기에 맡겨놔야 됩니다. 왜냐하면 악과 선도 다 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 되는 것도 거기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되는 거라면 ‘거기서밖엔 해결하지 못하겠구나. 나를 테스트 해보려고 그러는 거지.’ 하고선 다시 거기 넣고, 잘됐으면 감사하게 거기 놓고, 이렇게 두 가지 요건이 다 그렇게 돼야 됩니다. 이거는 내가 아주 슬기롭게 했다는 건 없습니다. 내가 한 것도 없고, 내가 했다는 생각조차, 안 된다는 생각조차, 빨리 하겠다 하는 생각조차도 놔야 합니다. 모든 걸 일체 실험해 보십시오. 모든 걸 거기 맡겨 놓고 감사하다, 거기서밖에는 해결 못 한다는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마음의 흐름을 잘 지켜보고 화내는 마음을 잘 다스려서 뒤돌아 서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염화미소의 진의

염화미소(粘花微笑)에 대한 공안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영취산에 백만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대범천왕이 꽃가지 하나를 부처님께 드렸는데 부처님은 그 꽃가지를 번쩍 들어서 대중에게 보일 뿐 일언반구의 말 한마디가 없으셨고, 이때 마하 가섭이 그 이치를 알고 빙긋이 웃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든 진의가 무엇입니까?

백만 대중이라고 했는데 벌써 그건 꽃 한송이로 표현이 됩니다. 백이라는 숫자도 없고 만이라는 숫자도 없습니다. 대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체 포괄된 하나에서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 평상심입니다. 그래서 그 모두를 한꺼번에 든 그 꽃 한 송이는 그냥 꽃으로 보아서는 안 되죠. 그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꽃을 들기 이전, 전체 포괄된 하나의 꽃을 드는 순간 벌써 꽃은 들기 이전에 그것이 평상심입니다. 그렇다면 평상심에 전체가 들은 그 하나를 내보일 때, 벌써 가섭존자는 그것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하나를 웃음으로서 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이게 둘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님과 가섭 존자의 두 마음만 같이 혼합이 된 게 아니라 전체적인 혼합입니다.
부처님께서 꽃 하나 든 것은 일체 유생 무생, 하늘과 땅을 한데 포함한 한 개의 꽃을 들었다는 표시입니다. 꽃 이파리는 각각입니다. 쪼개져 있습니다. 쪼개져 있는 그 자체가, 한 대의 꽃송이는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대에 평상심에 의해서 전부, 골고루 꽃 이파리는 거기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꽃 몽우리가 모두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를 비유해 볼 때 그것은 일상생활의 전체를 포함한 뜻입니다. 거기에는 법도 있고, 거기에는 자비로서의 나툼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꽃 이파리만을 이파리라고 정의해서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전체를 한데 합해서 나툼이라는 뜻을, 즉 말하자면 그건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말로 하는 열반이 아닌, 규정을 지어서 아주 다양하게 같이 돌아가면서, 즉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목각으로 사람도 만들고 꽃도 만들고 그림도 잘 그리면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를 해도 그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내기 이전 그것이 똑같은가 하면 그 각각의 이파리도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여러 개의 꽃 이파리가 있지만 모두 한군데에 붙어 있습니다. 한 대에 붙어 있죠. 그러니 그걸로 표현할 때는 가섭존자도 누구도 다같이 한 꽃에 있는 이파리라는 표시를 그대로, 불법승 삼보와 삼세를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을 한데 합친다면 평상심이며 바로 보시와 법입니다. 그래서 그 꽃을 든 거를 평상심이 있으면은 보시가 있고 보시가 있으면 자비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세 가지가 포함해서 몰락 한데 합쳐진 거죠. 그래서 그것은 표현을 하자면 한 개의 금 열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가섭 존자는 열매가 된 것이지요. 부처님과 더불어 따로 열매가 된 게 아니라 하나의 열매를 맺은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 없이 해놓으신 그 말씀이나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는 말이나 그 뜻을 모르고서는 더 좋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좋은 말을, 말 없이 꽃 한송이를 들어서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싸고,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 없이 들었건만 그 도리를 모른다면 밥 한그릇 주워먹는 것만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이것이 바로 그 꽃 한송이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우리들에게 뜻이 되어 돌아오도록 부처님의 말씀을 역을 해서 여러 개의 경을 설해 놓았습니다. 그랬건만도 이날까지 그 뜻을 알고 지내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뒤로 수백의 선사들이 나고 또 그 밑으로 참 많은 큰스님네들이 나셨지마는 진짜 우리가 그 꽃 한송이의 뜻을 알고 지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들뿐이겠습니까마는 그 참 말씀에 의해서 쫓아가려고 하지만 그 뜻에 의해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든다면, 바로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뜻을 아마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남음이 있어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데 활용을 하면서 자유자재 할 겁니다.


내 안의 씨를 발견하려면…

제 안에 저의 씨앗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있다면 제 안의 씨를 발견해 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저의 씨와 일체 제불의 씨가 진정 하나인지요.

마음 도리를 알기 쉽게 말하기 위해서 가끔 수박으로 비유를 합니다만, 우리 인간의 씨는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질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한다 이겁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 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박을 쪼개면 그 안에 수박 씨가 들어있다는 건 알지 않습니까?
근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쪼개지 못하기 때문에 그 속에 씨가 들어있는지 모른다 이겁니다. 작년 씨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씨를 찾으라고 하니까 작년 씨만 생각을 하고 작년 씨만 들고 있는 겁니다. 마음으로 들고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거니까. 예를 들어서 수박더러 “네 씨를 네가 찾아라”고 하니까 제 속에 제 씨를 두고 바깥에서, 작년 네가 나오기 이전 네 씨를 찾으라고 하니까 작년에 심었던 씨를 찾는 겁니다. 그러니깐 영 못 찾죠.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걸 모르고요. 벌써 작년 씨는 화해서 올 씨가 됐는데, 작년 씨로 말미암아 올해 자기가 나서 올 씨가 됐는데 그게 찾아집니까? 그 수박은 자기 안에 씨가 들어있는 줄을 모르고 작년의 씨를 찾고 있는겁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수박과 같이 내 몸이 수박이라고 한다면 수박 안에 씨는 들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수박 씨 때문에 지금 내가 살이 붙은 겁니다. 그러고 익어갑니다. 안의 씨가 여물었기 때문에 이 거죽도 익은 거지, 만약에 그게 여물지 않았다면 바깥의 수박이 익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바로 씨가 자기 속에 들어있다는 걸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속에 들은 그 씨를 못 보걸랑 나를 봐라 이거죠. 각자 나를 봐라, 내 수박이 있지 않으냐 이거예요. 수박이라면, 비유해서 얘깁니다. 내 몸이 각각 수박이라면 그 수박 안에 씨가 있는 줄은 알아야 될 것 아니냐 이겁니다. 직감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우리가 지금 몸이 있기 때문에 씨가 있다는 거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몸이 있는 것이 원인이 되고 근본이 되고 그것이 실상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도 말씀하시고 예수님도 말씀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씨로 비유한 겁니다. 그 씨 한 알 가지고, 올해 씨 하나 가지고 ‘밥 한 그릇’ 했습니다. 그 씨 하나 가지고도, 온 세상을 먹이고도 그 수박 씨는 되남더라 이겁니다, 쉽게 말해서. 그러면 “올 밥 한 그릇 가지고 세상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그 밥 한 그릇은 되남았으니….” 하는 소립니다. 만약에 그 수박 속에서 씨 열두 개가 나왔다면, 열두 광주리를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는 되남았다는 소리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그 씨 하나에 수박이 얼마나 열립니까?
그런데 그 씨 하나가 말입니다. 일곱으로 화했다 하더라도 그 일곱 중에 또 씨를 번져 보십시오, 얼마가 되나. 그러니까 그 하나의 씨를 가지고 이 세상을 다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거는, 그 씨 하나가 바로 전체 생명이 하나로 돌아가듯이 하나다 이겁니다. 여러분의 씨 하나가, 차원은 여차 해놓고 씨라는 거는 똑같습니다. 씨라고 부르는 거는 똑 같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만 가지 천차만별로 돼 있는 씨라는 그 자체가…. 다 먹이고도 그게 남지 않습니까? 이거는 아주 발겨서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그래서 예전에 어느 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올 무렵, “모든 형제들이여! 이왕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갈 바에는 풀 한 포기 없는 데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그래요. 공으로 얘기한 겁니다. 공의 도리를 얘기한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떤 스님이 그 말씀 끝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이왕 동쪽으로 서쪽으로 갈 바에는, 잡초들을 하나하나 낱낱이 밟고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나 그 말이나 똑같은 얘기죠. 똑같은 공 도리를 말한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야! 이 세상에 뭐가 없다 있다 할 수 있겠나. 저 아래 삼거리에 내려가면은 달구지, 말도 많건마는 말이야” 천차만별로 갈갈이, 삼거리에 내려가면 말과 달구지가 많다 이겁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가 지금 살면서 천차만별의 씨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종류가 많은데, 씨라고 부르는 건 하나밖엔 없다 이겁니다, 씨라고 부르는 소리는. 그래서 달구지와 말은 많으나 그 채찍은 하나다 이겁니다.
여름이 따로 있고 가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풀 한 포기 있는 게 따로 있고 없는 게 아닌데, 그렇게 말씀을 해 놓으신 거는 역시 선지식들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 하셨다는 거, 덫을 많이 놓고 낚시 밥을 많이 던져 놓으셨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낚시 밥을 던져 놓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선종 도리는 아마 끊기고 돌아갔을는지도 모르죠.


관해도 뜻 떠오르지 않아…

스님 법문 중에 “샘솟는 물에다가 똥을 눠라.”고 하는 뜻이 근본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뜻인지는 제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제 차원에서 여러 가지로 생각이 듭니다. 어떤 때는 그런 습성이나 자기 습을 나오는 대로 놓는 건지 아니면 그걸 넘어서는 그런 측면에서 생각될 때도 있구요. 또 청정과 모든 것을 다 그냥 집어삼킬 수 있는 그런 측면도 생각이 되는데 관해 봐도 그 뜻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그 의정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십시오.

여러분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물들은 습에 의해서 그 마음을 떼 놓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어떠한 거든지 무조건 그 자리에 놓으라고 합니다. 그 도리를 다 알고 보면 과거도 없기 때문에 놔 버리면 없어질 거를 놔버리질 못해요. 그래서 놓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줬잖아요. 그랬으면 그렇게 해야죠. “그렇게 해.” 하게 되면 벌써 길이 틔게 되고 자기가 반듯하게 되고 초조하지 않고 패기가 생기고 의문이 생기더라도 거기다 ‘너만이 알게 할 수 있어’ 이러고 놓게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 놔야 또 뒤가 있죠. 그냥 무조건 저 물 내버리듯이 버리고 만다면 뒤가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깐 그렇게 하고 놓는 거지요.
‘너만이 시자를 건강하게 해서 심부름을 하게 할 수 있잖아’ 이것도 분명코 그 뒤가 있으니까, 언제나 끊어지지 않고 돌아가니깐 그 뒤가 있어야 되는 거죠. 그렇게 뒤가 마무리가 되야 회향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깐 눈 동그랗게 뜨고 전자엔 기어 다녔지만 생각을 할 때에 앞뒤를 그냥 딱 다 끊어버려요. 앞뒤를 다 끊어버리고 아주 정확하게 관하면서 지켜보는 겁니다.
그러고 맑은 물에 똥누라는 거는 물론 크게 생각하면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는 말이겠지요. 깨끗하고 더럽고가 없는 까닭에, 옆에 보니까 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그러니 생각할 때 아무도 없고 무섭지 않겠어요, 그때는 나이도 어린데. 근데 무서운 건 둘째 쳐놓고 무섭고 두려운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감사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맑은 물에 똥을 누라고 그러는데 그거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이 맑은 물도 깨끗한 게 아니고 더러운 것도 더러운 게 아니로구나 하는 거를 알았지만 그 가운데서 뭐가 있을까 했는데 그게 그렇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옆에서. 근데 내가 이렇게 보는 순간 뱀이 머리를 싹 들어요. 머리를 싹 드니깐 뭐가 나오냐 하면 백 백(白)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거 생각하느라고 그게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냥 그걸 노리고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무슨 생각이 또 나오느냐 하면, 그것이 머리를 들었다가 또 가느라고 쭉 펴는 거를 보고 ‘아 저게 한일(一)자구나’ 이렇게 배우고, 그것이 맞든지 안 맞든지 간에 어떤 걸 배우든지 그것이 자기한테는 큰 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깐 조심스럽게 생각을 하되 하지 마라 이겁니다. 그러니 생각을 하는데 앞뒤를 딱 끊어 버리고 좀 패기 있게 하세요. 정말 진짜로 그렇게 해봐서 안 될 때에는 ‘아니 되게 하는 것도 너니까 너 알아서 해’ 하고 또 내려놓고 열심히 관하도록 하세요.


왜 귀신이 무서울까요?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면서 죽은 세상 산 세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 귀신을 보거나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왜 귀신을 무서워하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이 모두 살고 있기 때문에 귀신도 있고 선신도 있는 거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는데 무슨 귀신이 있고 선신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만들어서 귀신이다 선신이다 하는 거지 만들지 않았다면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없는데 귀신이 있겠느냐, 모두 사람들이 지어놓고 귀신이다 뭐다 하는 겁니다.
이런 예도 있거든요. 생시에 참 친근했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젊은 한 사람이 멀리 떠나게 됐고, 또 한 사람은 늙어서 죽게 됐어요. 그래서 모든 재산을 그 젊은 사람한테다 모두 인계를 하고 가려고 그랬는데 이 사람이 영 돌아오질 않는 거죠. 그래서 그냥 죽어버렸는데 죽어도 떠나질 못하는 거죠. 그 사람이 와야만 인계를 할텐데…. 그러니까 가도 오도 못하고 그 정직한 마음이 그대로 착이 붙어있으니까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집에 누가 들어오질 못하는 겁니다. 그 집은 좋고 그러니까 나라에서 쓸려고 들어오기만 하면은 벌써 탁 나타나는 거라. 그러니 도대체 유령 집이 됐다 이겁니다. 그러니 누구도 손을 못 대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지나서 그 젊은이가 돈 버는 욕심에 도대체 아무 생각이 없다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생각이 문득 나는 겁니다. ‘아, 그 분이 돌아가셨나.’ 하는 생각이 들어가서 부랴부랴 돌아오니까는 아무도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그 노인은 돌아가셔서 동네에서 장례를 치뤄드렸는데 그 집이 유령 집이 됐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이 얼마나 착했는데 유령이 됐겠나. 모두 나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선 들어가니까 그 노인이 탁 나타나서는 “왜 인제 왔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늙은 모습 고대로인데 젊었던 사람은 살아서 늙었으니깐…. 예전에는 아저씨라고 불렀기 때문에 “아저씨, 그래 여기 여태 계셨습니까?” 하니까 “내가 모든 것을 넘겨주고 가야 하기 때문에 떠날래야 떠날 수 없었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서류들을 어디 땅속에 묻어놨고 내가 유서 써놓은 것도 있다고 하면서 그걸 가지고서 잘해라 이겁니다. 그러고 나니까 “인제 나는 간다. 그러고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 땅 이 집에서 그대로 하고 살게 되면 나는 네가 살고 있는 것을 내려다볼 테니까 너는 조금 더 살다가 오너라.” 하고 그냥 떠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가 없는 마음인데도 살던 의식이 그냥 남아서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깐 그게 큰 걱정이죠.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다 떼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착을 다 떼어야 됩니다. 내가 체가 없기 때문에 한생각에 우주도 갈 수 있고 지구도 벗어날 수 있고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사람사람이 살아서 전부 알고 죽어야 죽어서도 퍼뜩 알아차리고 한순간에 벗어날 수가 있죠. 그래서 아프거나 어떠한 일이 닥치거나 그래도 주인공에 다 맡겨라 하는 거는, 영에다 영을 넣으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 부와 현재 자가 둘이 아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귀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아주 불쌍한 어떤 사람이 애석하게 험데미를 쓰고 죽었다면 그 가슴에 멍이 듭니다. 그러니깐 제삼자가 해쳐지는 거죠. 그래서 귀신이 귀신이 아니죠. 본래 우리가 생각하기에 달렸습니다. 누구든지 나쁘게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나가는데 그냥 무조건 그냥 때려눕히고 가정을 못살게 한다면 그거 귀신 안되겠습니까? 산 귀신이 되는 거죠.
그렇게 당했을 때에 생각하고 안 당했을 때 생각하고는 다른 겁니다. 근데 만약에 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이 그런 꼴을 당했다면, 그런 꼴을 당하기 이전에 그렇게 당하지 않게끔 되죠. 그렇게 당한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이 없고 그냥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하면은 아픈 것도 빨리, 죄를 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빨리 낫고 가정이 도로 괜찮아지죠.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냥그냥 살다가도 누가 나쁘게 하면은 금방 부아가 생기고 한번 혼나봐라 이러고 주인공에다 맡길 수도 있는데, 그렇지만 주인공에 그런 거를 맡기라는 게 아닙니다.
주인공의 빽이 있기 때문에 나와 똑같이 지혜롭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 생각을 하면은 그거하고 똑같이 됩니다. 안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그거를 지음을 못하는 분들은 그게 안 되는지 되는지 모르겠지만 지음을 한 분들은 하나 하나가 거저가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하여튼 여러분이 때로는 또 고맙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안다를 떠나서 그래도 ‘주인공이 있다는데….’ 하구선 쥐고 가는 것만 해도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렇게 쥐고 가는 것만 해도, 즉 말하자면 파도가 쳐서 배가 뒤집히고 이래도 붙들 막대기가 있다는 게 어딥니까? 그러니깐 그냥 빠져서 죽을 염려는 없다는 뜻이죠. 여러분이 생각만 잘 한다면 귀신한테 홀려 죽는 것도 없을 거고 귀신한테 말려서 애를 쓰고 살지도 않고, 오히려 일체를 둘로 보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의 주장자를 붙들고 가시는 그런 분들에게는 앞에 어떤 것이 닥친다 하더라도 모두 선신으로서 천도를 시키면서 살게 될 겁니다.
200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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