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로는 불교공예 가운데 가장 기품있는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공양구이다. 부처님 앞에 바치는 향공양은 다른 그 무엇보다 진지하고 거룩하기에 향로 또한 그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향공양에 기울인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향로의 형상 그 자체에 숨김없이 피어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려시대만큼 향공양의 의식이 정교했던 시기도 드물 것이다. 고려시대의 향로는 다른 시대를 능가하는 정성과 단아함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눌지왕(재위기간 417~458) 때만 하더라도 향이 무엇인지 몰랐다. 중국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옷과 향을 보내왔는데, 눌지왕과 신하들은 그 향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랐다. 결국 전국에 수소문한 끝에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고구려 스님 묵호자(墨胡子)가 그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당시 묵호자는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인 일선군(一善郡)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 안에 땅굴을 파고 살면서 신라에 불법을 전파하려고 힘쓰던 때이다. 묵호자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명료했다.
“이것은 향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매우 강렬합니다. 정성이 신성(神聖)에게 사무치게 하는 것입니다.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더 낳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살라 발원한다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왕녀가 위독하자 왕은 묵호자를 불러서 향을 피우고 발원하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 신라시대의 향은 중생과 부처님을 연결하는 매개체요, 병을 낳게 하는 영험을 갖고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향완(보물 778호, 호암미술관 소장)에 새겨져 있는 명문을 보면, 향로를 통해서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고 중생들이 깨달음 얻기를 기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역시 향의 기능에 대해서는 묵호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흥왕사(興王寺)명 청동은입사용봉문향완(국보 214호, 1289년, 호암미술관 소장)은 고려시대 향로 가운데 수작에 속한다. 이 향로는 다른 향로에 비해 훤칠한 풍모에 단정한 기품과 풍요로움이 일품이다. 볼록하게 무리를 지은 원형의 받침에서 오목한 곡선을 그리며 솟아오른 받침 위에 다시 볼록한 곡선으로 노를 만들고 그 위에 옆으로 뻗은 직선으로 입술을 삼았다. 받침에는 고려 특유의, 영지모양의 구름을 가득 새겨 구름기둥을 표현하고, 그 위 노에 팔능문의 테두리 안에 용과 봉황이 노니는 모습을 담고, 여백에는 밝고 명랑하게 피어있는 연꽃과 갈대를 배치하였다. 이들 무늬는 은입사로 조용하게 새겨 단아하고 풍만한 외형의 틀을 전혀 깨트리지 않았다. 백제시대 금동용봉향로가 용과 봉황 등 그 자체로 향로의 형상을 나타내어 외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면, 이 향로는 단아하고 풍요로운 외형 속에 모든 물상들을 포용하고 있어 내성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향로는 삼라만상의 무엇이든지 향기로운 열기로 사르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것을 압도하는 단아함이 향로의 품위를 돋우고 있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