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당 개원때 위로·격려 큰힘
항상 바른 모습…소중한 가르침
포교에 있어서 일반인들과 관계를 맺는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현장이 도심의 포교당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포교당이야말로 공부하는 수행자, 수행하는 스님들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불교의 잘못된 선입견 중 하나가 산중의 수행은 경이의 대상으로, 도심의 포교는 무시의 대상으로 여기는 풍토다.
누가 뭐래도 불교는 믿음의 종교라기 보다는 수행의 종교인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수행의 의미이다. 수행이란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바른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수행은 장소의 문제가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문제이며 삶을 대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수행자의 모습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있을 수 있겠으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여기엔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여법(如法)’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불자들 중에는 ‘어느 절 스님은 참 잘 생겼다’ ‘스님의 목소리가 참 좋다’ ‘우리 스님 멋있다’라는 말씀들을 가끔 한다. 그러면 나는 그것보다 ‘스님, 참 여법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고 한다. 부처님의 모습, 진리의 모습과 같다는 말보다 더 훌륭하고 멋있는 말이 있을까? 수행자의 모습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는 참으로 여법하신 스님이 한 분 자리잡고 계신다. 원타스님이다. 스님과 나는 96년에 이웃한 포교당의 주지로 인연을 맺었다. 그때 스님께서는 도봉산 천축사의 주지스님이었고 도심 포교의 필요 때문에 인근 창동역 근처에 불교문화교육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스님께서 내가 있는 정혜사로 불쑥 찾아 오셨다. 포교당을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때다. 낯선(?) 스님의 방문이 반가울 리 없어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했지만, 스님은 환한 미소로 이웃에 살면서 서로 잘 지내자며 인사차 오셨단다. 경우를 따지면 내가 먼저 인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개의치 않았다. 살고 있던 동네의 지리와 환경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게, 스님의 위로와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스님은 많은 곳을 안내했고 여러 스님들과 사람들을 소개했다. 특히 스님은 누구를 만나도, 어디를 가더라도 흐트러지지 않는 행동과 그들을 위하는 말씀으로 수행자로서 바른 모습을 보여 주셨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나 역시 스님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한번은 사암연합회의 일로 인해 스님과 관내의 여러 사찰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연합회의 일은 재정적인 도움과 행사 참여의 일을 부탁하기 위함인데 개별 사찰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환영보다는 싫은 소리를 듣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도 스님은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일을 잘도 해내신다. 또 사암연합회엔 소속을 알 수 없는 무속인들도 다수 있는데,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더니 스님은 그들도 모두 부처님의 품 안으로 들어온 이상 잘 대해 주자며 여느 스님들과 똑같이 존대하신다. 그렇게 옆에서 지켜본 스님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스님이 문중의 일로 부산으로 가실 때까지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스님이 일상의 삶속에서 보여주신 평범하고 바른 모습은, 수행자의 삶이란 자기가 처해지는 현실에서 얼마나 그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 준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보현보살의 말씀 중에 ‘여설수행공양(如說修行供養)’이란 가르침이 있다. 배운대로, 말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언행의 일치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다. 불교의 진리가 훌륭하다는 것에 이견을 다는 불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비춰지는 불교의 모습은 기대이하인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좋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머리 속에만 넣고 다니는 것은 흙 속에 보물을 묻어놓은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리와 수행은 일상에서 실천될 때 그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일과 사람들과의 만남이 중요한 포교당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수행자로서의 모습을 자리매김할 것인지 원타스님을 생각하며 되새겨 본다. 그래서 여법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해 볼련다.
■서울 창동 정혜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