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6개의 숫자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거린 ‘2·8 사태’는 13명의 1등 당첨자를 내고 일단 마감됐다. 하지만 1등 당첨자가 열 명 넘게 나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횡재의 판타지에 사로 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판타지가 지금처럼 계속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로또를 비롯한 복권과 카지노에 대한 집착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2·8 사태’ 후에 매스컴은 연일 로또의 부작용을 한탄했고, 임시국회에서도 국회의원들이 총리를 훈계하며 한탕주의의 로또를 중지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앞서 정부는 로또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당첨자가 안 나올 경우 2회만 이월하기로 하였으나, 꾸중을 받고 부랴부랴 당첨금에 대한 소득세율을 대폭 높이려고 하고 있다. 정부도 로또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광기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던 것이 틀림없다. 정부가 예상한 로또의 일년 판매액은 세 달이 지나기 전에 이미 초과했다. 매스컴은 이렇듯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무대책을 꾸짖는 한편, 복권 사는 사람들의 ‘대박’ 꿈도 타이르는 이중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정부가 우왕좌왕, 우물쭈물하는 것이 측은하기는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복권의 한탕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족국가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全)세계적 규모로 진행되는 자본의 불안정성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를 휘두르는 것은 더 이상 산업 생산성의 성장이 아니라 투기적 지출의 증대이며, 민족국가의 재정통제 기능은 형편없이 축소된 지 오래이다. 고전적 자본주의가 물러나고 ‘카지노 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탕주의는 예외가 아니라, ‘카지노 자본주의’의 모범적 윤리라고 할 만하다. 고도의 휘발성을 지닌 자본의 흐름에 민족국가의 권력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로또를 사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중하층 이하의 계층에 속한다. 이들의 눈으로 우리의 주변을 보라.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자존심을 판 대가로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는 자신에 비해, 부동산 투기와 증권 투자로 순식간에 엄청난 돈을 버는 자들이 있다. 매스컴은 한편으로 영화배우와 스포츠 스타의 천문학적 고수입에 대해 끊임없는 보도하며, 자기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한 이도 그런 스타들과 같아질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의 ‘민주주의’를 반복하여 주입한다. 코리안 드림의 비결은 스타처럼 소비하며, 스타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것이다. 신용불량자의 대부분은 소비를 자기 정체성의 근거로 삼았던 이들이고, 소비를 자유의 향유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신용불량자와 로또 복권을 사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 있다고 떵떵거리는 ‘분’들도 하나같이 ‘고스톱’ 치듯이 돈을 모은 자가 아니던가? 차이는 그들이 단지 재수가 있었다는 것일 뿐이다.
로또를 사는 사람들은 5일 동안 몇 십억 원의 ‘대박’ 꿈에 취해서 지낸다. 실망은 하루뿐이다. 그들은 당첨될 경우에 대비하여 행동 강령을 만들고, 분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미리 공증을 받아 놓는다. 그들의 머릿속은 이미 세계를 누비면서 돈 쓰는 일로 바쁘다. 누가 이들을 훈계할 것인가? 누가 정부의 무기력을 질타할 것인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일찌감치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뻔한 일이 일어난 것을 가지고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잠시나마 ‘2·8 사태’를 대면하기 두려워 그런 것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