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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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쩔어 병든 사회
구승회 교수
동국대·윤리학

얼마 전 친구 둘과 유럽 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보세구역으로 들어서자마자 면세점으로 가서 조니 워커 블루 세병을 샀다. 얼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술 박스에 큰 병 하나와 작은 병 하나가 들어 있어서 모두 여섯 병이 되었다.
독일 공항에서는 1인당 한 병씩만 소지할 수 있다는 나의 확실하지 않은 정보에 속아, ‘뱃속에 넣어가지고 가는데 시비 걸지는 않겠지!’라며 우리는 기내에서 작은 3병을 모두 마셔 버렸다. 술을 싫어하고 많이 못 마시는 나로서는 짧은 시간에 독한 술을 세 병씩이나 마셔야 하는 강제된 행운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감히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술꾼이 아닐지라도 위스키가 취하도록 마시거나 벌컥벌컥 마시는 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귀국길에 인천공항 세관에서 발생했다. 조니워커 블루 2병을 들고 나가던 친구가 세관원에게 호출되어 수십만 원의 세금을 물었던 것이다. 물론 술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저런 고급 물건을 많이 사온 탓이 컸지만 즐거워야 할 여행이 그 일 때문에 아주 불쾌하게 끝나고 말았다.
한국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건 세계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계산법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긴 하지만, 최근까지 술 소비량 세계 2위라는 통계가 유력하다. 작년 한해 우리 나라에서 500ml짜리 위스키 약 5400만병이 팔렸으며, ‘발렌타인’ 17년산의 경우 전체 생산량의 35.7%를 한국 사람들이 마셔버렸다고 한다. 어린애를 포함해서 전 국민이 일년에 위스키 한 병 이상 마신 셈이다. 소주, 맥주 등을 포함시킬 경우 국민 한사람이 매일 소주 한 병을 마신 꼴이라는 국세청 통계가 있다. 어린이나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술을 못 마시는 노약자를 제외하면 건강한 한국인은 일년 내내 술에 절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IMF 금융위기 같은 국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은 약한 술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려서’가 아니라, 독한 술 위스키에 취해서 저지른 일인지도 모른다.
작년 말에 시사 주간지 타임은 “한국은 비쌀수록 잘 팔리는 세계 위스키 시장 새로운 희망”이라는 기사를 내 보낸 적이 있다. 기사는 한국 사람들이 위스키를 많이 마신다는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위스키 시장의 봉’이라는 뉘앙스로 일관했다. 관광 시장에서도 한국 관광객은 봉이다. 해외의 명품 시장은 언제나 한국인들로 붐빈다.
학문 시장도 마찬가지다. 구미의 학자들 사이에는 한국이 물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을이면 이런 저런 학회와 단체들이, 학문적 명성에 상관없이 아무나 불러들이고 엄청난 강연료를 지불한다. 그리고는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은 안하고, 주최자나 초청기관의 홍보성 과시용으로 전용된다. 주최측의 권력이 클수록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위스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시기 위해 위스키를 사지 않는다. 인사하고 과시하고 김광규의 시 구절처럼 “적잖은 술과 안주를 남긴 채, 서로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지”는, 그냥 얼굴 한번 보는 자리에 구색을 갖추기 위해 위스키를 산다. 권력이 큰 집단의 모임일수록 비싼 위스키가 많이 남는다.
조니워커 블루가 그렇게 좋은 술 인줄도 모르고,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그 술 두 병을 조카에게 그냥 줘 버렸다. 그 피 같은 술을 말이다.
200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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