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은 수행, 놓아버리는 과정
열정적인 전법여행을 펼치던 케마 스님은 어느날 ‘유방암 선고’란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쳤다. 그러나 스님은 수행 지도를 쉬지 않은 것은 물론, 남은 생을 약물 투여와 치료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입원도 거부한 채 목숨을 건 마지막 용맹정진에 나섰다.
발병 후 9년째가 되자 케마 스님의 육체적 고통은 더욱 심해졌고 수술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스님은 입원해서도 간호사와 환자들에게 법을 설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5주 동안의 입원기간은 동분서주하며 전법에 나섰던 육신을 모처럼 쉴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스님의 큰 원력을 짐작할 수 있다.
케마 스님은 입원기간에 두 번이나 임사(臨死) 체험을 하며 극적인 수행의 전기를 맞이 한다.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고 말조차 나오지 않는, 모든 기능이 정지된 것 같은 죽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케마 스님은 이 때 죽음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나 저항도 없었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의 지극한 정성을 생각할 때 조금이나마 생에 대한 의지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죽음과 유사한 체험을 통해 수자상(壽者相 목숨이 있다는 생각으로 몸에 애착을 갖는 것)을 놓아 버릴 수 있었다는 케마 스님은 병고(病苦)가 진정한 스승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집착을 놓아버렸기에 아무런 부족함도, 원하는 것도 없는 마음의 상태를 얻게 된 것이다.
케마 스님은 아잔 차 스님(1992년 입적한 태국의 고승)이 언젠가 ‘방에 왜 그렇게 물질문명의 소산인 물건이 많으냐?’는 일반인의 질문에 대해 답했던 설법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유리가 탁자 위에 잔의 형상을 갖추고 존재할 때 이 유리는 아름다운 색채를 드러내기도 하고 경쾌한 소리도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것이 유리잔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이미 부서진 유리일 뿐입니다.”
자신도 이미 ‘유리(相)가 깨진 것’과 같은 마음 상태에 놓여있음을 암시한 말이다. 케마 스님이 1999년 독일 붓다 하우스에서 입적하기에 앞서, 자신의 짧고 굵은 수행여정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밝힌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법문이다.
1923년 독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스님은 미국에서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후 60년대에 남편과 함께 히말라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으로 명상여행을 떠나면서 출가인연의 싹을 틔웠다.
이후 오스트리아에 머물던 케마 스님은 73년 영국의 칸티팔로 스님을 만나 비로소, 가슴으로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길을 발견했다. 케마 스님은 79년, 55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해 스리랑카에서 니안포니카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회고한 케마 스님은 많은 비구니 제자를 양성하고 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스님은 1987년 세계 최초의 비구니 국제대회를 주관, 불교여성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여세를 몰아 국제 불교여성단체인 사키야디타(Sakyadhita)를 창설하는 업적을 이뤘다.
김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