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사지
성보(聖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전국에 산재한 국보급 불교문화유적을 살피다보면 대부분 성보의 주인공으로 고승들의 화려한 명성을 쉽게 접하게 되지만, 정작 그 성보를 만든 이름 없는 도공이나 석공의 수고에 대해서는 스쳐 지나가게 마련이다. 성보의 문화재적 가치가 그 유적이 담아내고자 한 단순한 시대적 동기에 있다기보다, 유물 그 자체에 아로새겨진 기술과 공력의 가치에 있다면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나 평가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시간과 공간을 읽는 성보의 올바른 독도법(讀圖法). 씨줄뿐만 아니라 날줄의 위치에서도 국보 유적의 겉과 속을 꼼꼼히 살피는 것이 진정한 폐사지 탐험의 안목이다.
지난 천년간 인류문화사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금속활자’가 손꼽힌다. 금속활자를 통한 인쇄술의 발명은 정보화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인류 문화 발달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언어의 사용을 인류 정보화의 1차적 혁명이라면 문자의 창안은 경험과 지식을 정리, 체계화시킨 정보화의 2차 혁명이었고, 금속활자의 탄생은 지식과 정보를 대량으로 보급하여 인류 문화를 급속도로 발전시킨 정보화의 제3차 혁명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컴퓨터를 통한 초고속 IT산업의 시대로 정보화의 세기가 만개한 제4차 정보화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가 탄생한 흥덕사지(사적 제 315호)는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에 마땅하고 ‘직지’를 탄생시킨 주인공들도 이 땅의 선지식들이고 흥덕사지 또한 그들이 머물던 절집이었다는 점에서 불자와 국민들이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다.
1377년(고려 우왕 3년) 여름 밤 청주 땅 양병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 흥덕사에는 백운화상(白雲和尙 1299~1374)의 문도들인 제자 석찬과 달담 등이 모여 선사의 안목이 집약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목판이 아닌 주조본(鑄造本)으로 뜨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활자를 만들기 위한 밀납, 만고에 빛날 경책을 인쇄할 종이 값을 마련한 사람은 비구니 묘덕이었다. 쇳물을 만들기 위해 장작더미에 풀무질을 하고, 창호지를 뜨기 위해 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그들의 가슴은 달아오른 쇳물보다도 뜨거웠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스승의 얼이 깃든 ‘직지심체’를 한자 한자 조판하는 무릎에는 기울어 가는 고려의 국운도 놓여 있었을 것이다.
‘직지’의 고향인 흥덕사지가 발견된 것은 1894년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운천지구토지개발’ 공사를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민묘(民墓) 몇기가 야산 언덕 길을 막고 있어 함부로 파헤쳐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세계적 문화유산의 숨결이 어린 흥덕사지를 보호하는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이다. 1985년 청주대학 박물관에서 이 이름 모를 폐사지에 대한 발굴작업을 시작한 결과 “흥덕사(興德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 쇠북과 청동 불발(佛鉢) 등이 발견되어 <불조직지심체요절>하권 말미에 기록된 ‘청주목외 흥덕사주자인시(興德寺鑄字印施)’라는 문구와 일치, ‘직지’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흥덕사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흔히 ‘직지심경’이라 불리는 ‘직지’는 단편으로 기록된 불교의 경전이 아니라 백운 화상이 찬술한 <선문염송집>등 선가의 요체를 초록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수신오도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강원의 대교과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학승들이 공부하는 참선의 대표적인 학습서이다.
‘직지’를 찬술한 백운화상은 백운이 그 호이며, 법명은 경한(景閑)이다. 고려 충렬왕 24년에 전라도 고부에서 출생하여 중국에 건너가 양주 회암사에 자취를 남긴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화상으로부터 불법을 전수 받았다.
백운화상이 75세의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올바른 선풍을 전등(傳燈)하여 법맥을 전수케 하고자 찬술한 ‘직지심체’의 금속활자본 ‘직지’의 원본은 숱한 수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행방이 묘연하다. 다만 상·하 2권 중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애꿎은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직지’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금속활자본 중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200년대 초, 이미 고려 왕실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규보,<동국이상국집>)이 있었을 만큼 발전된 금속인쇄술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우리보다 78년 늦은 1455년에 구텐베르그가 ‘42행성서’를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 처음이고, 중국은 1490년 명조 대에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둠의 한 켠에 서서 역사를 풀무질하고 불심을 담금질하여 먹물 묻힌 사문의 손으로 만든 ‘직지’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흥덕사지는 사지 발견 후 1987년부터 1991년까지 5년간에 걸쳐 국비 29억과 지방비 14억 등 총 43억을 들여 금당과 석탑을 복원하고 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흥덕사지의 복원은 복원이 아닌 단순한 건축물의 껍데기를 축조한 것으로 잘못된 복원의 표상으로 그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직지’의 고향이라는 용어가 무색한 훼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흥덕사지가 불교적 성지로 복원된 것이 아니라 인쇄문화의 상징적인 의미로 복원되었다는 정치적 논리를 감안하라도 흥덕사지는 사지(寺址)가 아니라 사지(死地)가 되어 버렸다. 종교의 성지를 문화재의 가치로만 보는 것은 그 안에 깃든 정신과 의미를 간과한 껍데기 사랑에 불과하다. 흥덕사지가 명실상부한 직지의 탄생지로 그 명예회복을 하기 위해서는 훼불의 관점에서 흥덕사지의 잘못된 복원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이는 또 다른 폐사지 복원에 있어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충주 주덕 숭선사지
흥덕사지 가는길
흥덕사지를 찾기 위해서는 경부고속도 청주 IC→ 8㎞, 중부고속도로 서청주 IC→5㎞를 직진하여 청주 예술의 전당 앞 운천동으로 직진하면 된다. 청주 시내에서 시내버스는 691, 692, 693번이 있어 운천동 흥덕사지 앞에서 내리면 되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720, 728, 731번을 이용하여 마찬가지로 흥덕사지 앞에서 하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