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으로 새해를 맞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처님의 법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이 찰나찰나 나투는 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사는 데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공간도 만들어 놓고, 날짜도 만들어 놓고 해우년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한 해가 지나가고 올해는 더 한층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내 마음을 개선시키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께 항상 자기 주처를 믿고, 즉 주처라는 자체가 주장자도 되고 불성도 되고 자부처도 됩니다. 하지만 이름이야 그 중에 어떤 걸 부르면 어떻습니까마는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주인공이라는 걸 알고 있고 또 주인공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또 우리가 천차만별의 생활을 하면서 주장자를 세워서 항상 수레가 구르듯이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수레는 중심을 꿰어서 그 중심 꿰어진 심봉이 바로 수레를 굴리는 거죠. 그 심봉의 힘에 의해서 의지하고 거기서 힘이 배출되기 때문에 바퀴가 이탈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얘기인데 모두 심봉에 의해서, 육조스님이 말했듯이 내가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모두에게 다 불성이 있습니다. 불성인 주장자가 완벽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주장자를 믿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그 주장자를 통해서만이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직결이 돼있고 또는 이 세상만사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다 가설이 돼있는 겁니다. 우리가 말을 모르지만 뜻은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습은 다르지만은 생활이 같고 생명도 같고 모두 차원에 따라서 다르지만 어찌 생활이 다르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가 새해 정월에 촛불재를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점이 있고 또 한가지는 우리가 구랑신이 들린 해가 있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구랑신이 내릴 때에 집을 지으면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또는 삼재가 들면 액난이 들어서 그 해는 상당히 조심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일체 모든 게 직결이 돼있고 가설이 돼있는 까닭에, 악행이라는 그 자체가 생활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말로 헤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누구 말마따나 지수화풍으로 벌어지는 일들, 또 사람이 가다 혹사를 당하는 일들을 말로 입으로 어떻게 다 하겠습니까. 각자에게 그렇게 벌어지는 일들을 말입니다. 자기 주인공 주장자가 직결처이기 때문에 삼재든 구랑신이든, 어떠한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거기에 통신이 되면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구성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구랑신도 없고 삼재도 없고 고도 없고 집착도 없고 멸도(滅道)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더불어 역대조사들이 다 말씀하셨듯이 자기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습니다. ‘너의 뿌리를 알고 둘이 아닌 줄을 알고, 찰나찰나 생활을 하고 찰나찰나 공해서 없어지는 줄 알아야 둘 아니게 여여하게 들이고 낼 수 있느니라.’ 그래서 이 마음공부가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겠습니다. 마음 자체가 광대하고 무변해서 통신이 안 되는 데가 없습니다. 새들이 지저귀어도 다 통신이 됩니다. 꽃들이 피어도 다 통신이 됩니다. 하다 못해 돌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듣지 못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들을 하시겠지만 들리지 않아도 뜻으로는 같이 다 통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길을 걷다가 잘못되는 일이 있을 때 옆에 서있던 돌이 스스로서 다른 곳으로 가게 합니다. 거기하고 마음이 통하니깐 그 마음이 스스로 저리로 가게끔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바깥으로 한다면 통신처 근처도 가지 못하기 때문에 통신이 안 되는 겁니다. 각자 내 가정을 위하고 나를 위해서 거기다 모든 거를 다 일임하고 진실히 관한다면 저절로 통해서 일체 한마음으로 통하는 겁니다. 이런 말을 안해도, 우리 불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안해도 그냥 저절로 통합니다. 이게 공덕이며 공심입니다.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간단하게, 모든 것은 주인공 주장자에다 다 일임해라, 일임하고 굴리는 것은 각자의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오는 것을 대치해 막아나가는 것을 ‘굴린다’고 합니다. 역대조사들도 그랬고 부처님도 그랬고 다들 일심으로 그 구녘에다가, 구녘도 없고 구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려니까 털 구녘이라 그랬습니다.
차 운전을 하고 다닐 때도 ‘오늘 하루도 무사히 운전하게 해.’ 관하고, 내릴 때에도 ‘무사히 운전하게 해서 감사해.’ 하고 일심으로 언제나 자기를 리드해 나가고 사회를 리드해 나가고, 자기로 인해서 리드해 나가는 그 주동자를 항상 주시해야 되겠죠.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주시를 안해도 주시한 게 됩니다. 그놈이 육신을 움죽거리게 해서 보게 하고 듣게 하고 가고 오게 해서 움죽거리는 거니까 자기 주장자가 주동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 주동자가 바로 자기를 이끌어 가는 선장이에요. 왜냐하면 심봉이 끼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움죽거리지 않는 심봉이 힘을 배출해서 수레바퀴가 돌아가니까요. 자기 몸이 수레바퀴라고 한다면 수레바퀴와 같다는 겁니다. 여북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수레바퀴 돌아가듯 한다는 말을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주동자가 바로 자기를 이끌어 가는 선장이거든요. 왜 선장이라고 하느냐, 심봉이 끼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움죽거리지 않는 심봉이 힘을 배출해서 수레바퀴가 돌아가니까요. 자기 몸이 수레바퀴라고 한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수레바퀴와 같다 이겁니다. 여북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수레바퀴 돌아가듯 한다,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해가 가실지 모르지만, 이해가 가실 겁니다. 하도 말을 해서…. 하하하. 말하는 것도 저는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체조사들 일체제불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 돼서 내 입을 그냥 통하는 겁니다. 모습을 보고 이러니 저러니 하지 마세요. 수레바퀴가 돌아가는데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 거기 먼지가 앉을 새가 어디 있으며 병고가 붙을 새가 어디 있으며, 삼재가 붙을 새가 어디 있으며 구랑신이 붙을 새가 어디 있으며 이 세상만사에 모든 것이 붙을 새가 어디 있습니까? 고가 붙을 새가 어디 있구요? 그거는 우리가 지금 현재에 발자취를, 줄창 이런 말을 하죠. 발자취를 떼어놓으면 한발 없어지고 떼어놓으면 한발 없어지는데 무슨 고가 붙습니까? 떼어놓으면 한발 없어지고 떼어놓으면 한 발 없어지는데….
근데 苦가 있습니까? 팔자운명이 있습니까? 구랑신이 붙어 있습니까? 삼재액난이 붙어있습니까? 붙어있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그게 붙어지는 거지 붙어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깐 내 몸도 소중하다 하는 것은 그 생명들의 의식들도 몸과 더불어 같이 한 개체로서 움죽거리게 돼야 상대를 알고 세상을 알고 있으니까 봐도 본 사이가 없어요. 보면 다른 걸 보게 되죠. 들으면 다른 걸 듣게 되죠. 여기 가면 저기 가게 되죠. 차를 타면 내려서 또 다른 차를 타게 되죠? 이 사람 만나면 저 사람 만나게 되죠? 일을 하려면 여러 가지를 들어야 하는 거니깐 이거 갖다가 넣고 저거 갖다 놓고 이거 갖다 하고 저거 갖다 하고, 이렇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수레바퀴 돌아가듯 하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본래. 그런 거를 이유가 많고 사단이 많으니깐 오히려 불교는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자기를 빼놓고 자기 뿌리와 싹을 다 빼놓고 타의의 형상을 믿고 이름을 믿고 타인을 믿는다면, 자기 고깃덩어리를 믿는다면 그거는 도깨비장난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너를 먼저 알아야 세상을 알고 세상을 알아야 남을 리드할 수도 있고, 정신계의 원동력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고 물리가 터지게 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 영혼의 근본은 항상 들어갔다 나왔다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근본은 둘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찰나찰나 떨어졌다 찰나찰나 들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근본 자리가 바로 통신처예요. 다 통신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데로 가지 못한 조상들이 있으면 거기다 맡겨라, 맡기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마음, 자기 주인공으로부터 일체제불의 마음이 통해서 그 마음자리에서 보살로 화해서 응해주신다 했습니다. 그래서 응신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만약에 그러한 일이 있어서 관한다면 자동적으로 지장보살로 응신이 돼서 응해주신다는 거죠. 컴퓨터에 입력을 하면 입력한 대로 꺼내 쓸 수 있듯이 그렇게 관하면 그냥 꺼내 쓸 수 있도록 돼 있거든요. 완벽하게 마음을 그렇게, 자기를 리드하는 자기 보디가드가 되는 참 보배가 항상 주둔하고 있다는 거를 믿어야죠. 그거를 믿지 못한다면 저 나무들을 보세요. 이파리 하나 가장구 하나도 다 자기 뿌리를 의지하고 있어요. 뿌리를 잘라낸다면 나무 싹은 다 죽어요.
여러분이 어디 가서 어떤 기복적인 말을 들어도 움죽거리지 않는 자기 마음부터 봐야 돼요. 내 마음 주장자가 발동이 돼서 움죽거리느냐, 안 움죽거리느냐 그거를 봐야 돼요. 그것이 완벽하다면 바로 앉아도 서도 잠을 자도 일을 해도 좌선이 되는 겁니다. 좌선을 한다고 해서 무릎을 꿇고 몸뚱이를 틀고 앉았기만 해서 좌선이 아니에요. 일을 하더라도 마음이 요지부동, 움죽거리지 않는, 자기 주장자가 움죽거리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면은 그것 또한 참선입니다. 어디에도 굴하지 않는다. 여북하면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깨우쳐 주는 게 아니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자손들을 낳았다고 해서 여러분이 자손들을 잘 살게 해주는 게 아니란 얘깁니다. 끝내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촛불재를 하면서도 허황되게 바깥으로 기도를 한다거나 한다면 그 재앙을 못 면할 겁니다. 그건 절대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생각을 안하면 부처요, 생각을 했다 하면, 생각을 하고 관했다 하면 법신이 되는 거고, 움죽거렸다 하면 화해서 보현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간편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한 이 도리를 생활이 아니라면, 먼저 선배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마는 듣고 아는 것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으뜸입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겁니다. 자기가 없고 무슨 세상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있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는 거고 좋은 일도 있는 거지 자기가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은 절대 움죽거리지 않으시겠지요? 옛날에 그럽디다. 여우가 아홉 마리가 나와서 그냥 꼬드겨도 움죽거리지도 않고 있었다구요. 허허허.
그래서 석존께서는 오직 일심으로 공부를 하신 거죠. 수억겁을 거쳐 내려오면서 진화가 돼서 형성된 자기를, 자기를 판거예요. 그래서 과거에 수없이 살아 나온 자기를 현재의 자기가 찾은 거죠. 서로 통신이 되고 상통이 돼서…. 그전에 그런 말했죠. 요 말 한마디하고 질문을 받겠습니다.
공부를 공부라고 할 건 없지만 어디를 가니까 묘지가 두 개가 나란히 있어요. 그런데 날은 어둡고 밤이슬은 차갑고 그러니까 묘지가 있는 데 가서, 그런 데를 가서 잘 잤거든요. 그런데 그 날도 거기 앉았는데 자부처님께서, 예를 들어서 과거의 나가 현재 나에게 하는 소립니다. ‘저 묘지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애비의 묘지고 하나는 자식의 묘지니라. 근데 애비의 묘지가 자식한테로 가면 자식과 하나가 되고 자식이 애비한테로 오면 애비로 하나가 되니 그건 무슨 연고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지금처럼 그렇게 퍼뜩 통했으면 뭐, 통하고도 그렇게 한 거예요. 통하면서도 그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채찍질을 한 거죠. 그래서 스승은 거기서 지금 스승이 있는 거지 딴데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그게 뭔가 하고 아무리 앉았어도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 거예요. 그날 밤 지내고 그 이튿날 낮이 가고 밤이 또 되고 그 이튿날 아침이 훤하게 밝아요. 그랬으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거를 해결을 못하고는 꼼짝도 못하겠거든요. 근데 비호같이 무슨 생각이 드느냐면 ‘아하, 그렇지.’ 그러고 웃었습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건 얼마든지, 백천만 개가 따로따로 있다 하더라도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그 이치로구나.’ 그래서 그 자리에서 궁둥이를 떼었습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했다 하면 법신이 되는 것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화해서, 즉 말하자면 화신이라고도 하지만 보현신이 되죠. 가다 엎드러져서 다리가 아프면 벌써 내 손부터 벌써 가죠? 내가 엎드러졌는데 누가 일으켜 주나요? 이게 바로 보현신이거든요. 모두가 남들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더불어 같이 위해서 보현신이 되는 거죠. 그래 보현행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깐 여러분께서는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못나고 형편없다 하더라도 그건 형편없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올 권리가 있어서 나왔고 나왔으니 또 살 권리가 있고 살고 있으니 자기가 자기를 리드하고 간다는 그 도리를 알게 돼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내 불성이 여여한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귀를 기울이고 그런 데 젖어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을 아주 완벽하게 밀고 나가면서 물러서지 않는 패기와 신념과, 또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는 것도 그런 신념에 의해서 따르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못났다고 해서 ‘나는 부처가 될 수 없어.’ 이러는 사람은 마음공부는 못하고 생사윤회의 바퀴에 끄달려서 평생을 그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 할겁니다.
▲질문자1: 제가 질문하려고 하는 것은 입력과 출력에 대해서입니다. 입력한 대로 출력이 된다는 그 말씀을 듣고 이왕이면은 좋은 거를 입력해서 좋은 출력이 나오도록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왕 입력하려면 크게 입력해 갖고 크게 출력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입력을 해봤습니다. ‘이생 몸 벗기 전에 꼭 스님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입력을 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니까 이거는 과대망상증인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분명히 자성불은 있는데 그걸 있다고 믿고 내가 이생에 몸 벗기 전에 이걸 해보겠다는 입력을 시키면은 입력한 대로 나온다 하니까 분명히 안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첫째, 그렇게 생각해도 이생에 스님 알갱이를 꼭 닮고 가겠다 입력한다면 그것은 어떻습니까?
▲스님: 그것도 맞습니다. 물론, 입력을 하되 그 경우에는 판단을 하고 안하고도 없습니다. 그렇게 될까 안될까 이것도 없습니다. 그냥이지. 그냥 무조건입니다. 벌써 그런 거를 했을 때에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문을 막는 겁니다. 잘되려니 안되려니 이런 이유가 붙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 것도 붙지 않고 그냥 무조건 나도 불성이 있고 저 스님도 불성이 있으니까, 일체제불이 있다면 일체선지식이 있다면 다 통하는 일이고, 나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입력을 할 때에도 언제 될까, 이게 될까 안될까, 아이, 나 같은 게 그렇게 할 수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간다면 금반지를 만드는데 무쇠도 넣는 경우와 같은 거죠. 허허허. 아무거나 넣는 거와 같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전한 금반지가 될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입력을 해두고 이생에 못하면 내생에라도 할 수 있겠다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즉 말하자면 여러분이 부산에 지금 가는데 말입니다. 아주 급해서 부산에 꼭 가야 하는데 이렇게 가야 옳은가, 가다가도 이거 가야 옳은가 안 가야 옳은가 한다면, 급해서 꼭 가야할 일이라면 그냥 무조건이지, 내가 여길 가면 지장이 없을까, 내가 가는데 실수가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갑니까?
빌딩에 들어가서 자는데 불이 났다 합시다. 불이 났는데 불이 나니깐 살 궁리를, 살 궁리도 아니고 그냥 구녘이 있으면 뚫고 나갈 생각만 나겠죠? 그 외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돼요. 사방에 막혀서 불이 타오르는데 내가 어디로 나가야 나갈 수 있나 요거만 생각이 되는 겁니다. 고때는 고런 생각밖에 안듭니다. 죽어갈 때 숨이 딱 끊어지려고 하는데 어린 자식들을 죽 앉혀놨어도 그건 어쩔 수 없이 다 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죠? 안 그래요?
내가 숨이 끊어지게 돼 있을 때는 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자식이고 뭐고. 그것도 숨이 붙어있고 살 때 얘기죠. 그런 마음이라야만이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오직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녘, 그 구녁은 자기 선장밖엔 없어요. 통신이 되는 것도 그렇구요. 하다 못해 새 한 마리도 통신을 하려면 거기밖엔 없거든요. 그래서 서산대사가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렸는데 마음이 통해서 서산대사가 새가 돼버렸으니깐 새가 자기가 앉고 싶은 대로 앉는 거죠. 안 그럽니까?
어떤 분들은 실답지 않게 생각하시겠지만 이 공부는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공부입니다. 그래서 정수에 자동적인 컴퓨터가 누구에게나 다 있으니까 관하는 것이 대뇌를 통해서, 사람기계가 그렇게 돼있으니 대뇌를 통해서 정수에 입력이 된다는 얘깁니다. 정수에 입력이 되면 사대로 또 통신이 됩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은 작용도 해주고, 그렇게 된다 하는 것은 입력이 돼있기 때문에 보살들이 즉 말하자면 어떤 용도에 따라서 지장도 되고, 관세음도 되고 약사도 되고 주해신도 되고 주산신도 되고, 지신도 되는 거죠.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그렇게 천차만별로 화해서 응신으로서 등장을 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제가 이런 말을 자꾸 해야 여러분이 좀, 한 마디 해서는 생소하다가 두 마디 세 마디 하면은 좀 낫고 그러다 보면은 아주 자기 것이 돼버리죠. 그렇게 된다면 그냥 실천을 하는 거죠. 적든 크든 간에 대치를 하는, 그냥 실천을 하는 거예요. 잘 안되면 되게끔 하는 실천. 그러나 자기가 과거로부터 지어놓은 차원이, 차원이 넓어져야 그게 없어지지 차원이 좁은 대로 그냥 있으면 그게 아무리 해도 자기 마음이 좁기 때문에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된다. 열심히 하라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힘들여 하지 말라는 거죠. 그냥 입력됐다고 믿었으면 입력한 게 나오는 거죠.
자식한테도 착을 두면은 오히려 자기와 더불어 꽉 붙들려서 자기 근본이 리드를 못해요. 그러니 그 영혼을 붙들고 있는 셈이니 그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붙들지 마세요. 자동적으로 그냥 부드럽게 해주고 부드러운 행을 하면서 그대로 놔 보세요. 둘 아니니까 네 마음도 내 촛불과 같고 내 촛불도 네 마음과 같으니 둘 아닌데 어딜 가며 나쁜 일을 하겠느냐 하고 진짜로 믿어준다면 그 자식은 그대로 돌아와요. 그대로 돼요. 여자나 남자나 똑같아요. 모습은 여자니 남자니 이렇게 부르지만은 마음이야 어찌 여자 남자가 따로 있으리까!
그렇게 물리가 터져서 지혜로워지면 차원이 높아지죠. 차원이 둥글어지고 그러면은 스스로서 가정을 이끌어 나가거나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도 그냥 그 털구녘 끼었다가 도로 빼고 요렇게 끼었다가 도로 빼서 쓰는 그러한 마음이 아니라 융통성 있는 마음이 돼서 여기도 그렇고 저기도 그렇고 다 그냥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마음이 생기죠.
▲질문자2: 질문을 드리기 전에 미리 아시고 많은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 법형제들을 대신해서 질문드릴 수 있는 행운을 가진 데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대대로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불교를 숭상하면서 자라왔습니다. 전에 근무하던 직장이 청주에 소재하고 있는데 직장을 그만 두고도 십 년 동안 그곳에 있는 법당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삼 년 전에 본원에 인연이 돼서 스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달에 천도재를 이곳에서 올렸고, 또 대학에 들어가는 아이가 있어서 백일기도 발원을 올려서 정규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모두 스님의 대은(大恩)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도재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천도재를 올렸는데도 왜 촛불재니 또는 조상을 위한 백종이니 하는 여러 행사가 있는데, 이 행사에 왜 계속 참여해야 하는지, 참여해야 하는 그 의미는 무엇인지 의문이 됩니다.
▲스님: 우리가 밥을 먹고 왜 또 밥을 먹습니까? 아침 먹었으면 됐지 점심 저녁까지 먹고 그 이튿날은 또 왜 먹습니까? 보십시오. 아침 쇳송에도 나옵니다만 부모의 은혜를 갚고 국왕의 은혜를 갚고, 만물의 은혜를 갚고 모든 생물의 은혜를 다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를 나고 길러서 이렇게 성장시켜 놓은 부모입니다. 그 부모가 우리를 낳아서 기르느라고 허덕지덕 하다가 돌아가셨다 이겁니다. 지금 이 도리 알고 돌아가시는 분들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천도를 시킬 때는 짐승으로 태어나지 말고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죄석방으로, 예를 들어서 개같이 살았으면 개로 태어나고 독사같이 살았으면 독사같이 태어날텐데, 그것을 무마시켜서 인도환생하라고 천도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에는 뭐가 또 따르느냐?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부처님 법을 만나서 이 도리를 공부하면서 부처님과 한자리를 하시게 해드리기 위한, 그 은혜를 갚는, 부모에게 묵은 빚을 갚는 재(齋)라고 봅니다.
어린애를 낳아 놓기만 하면 다 사회인이 되는 건 아니죠? 예를 들어 말하자면 말입니다. 잘 길러서 가르치고 가르쳐서 정상으로 만들어 놔야만이 어른입니다. 그럴 때까지는 해야죠. 그러다 보면은 또 끝이 나죠. 그리고 또 자식이 부모에게 받았던 것이 또 부모가 되어서 또 끝이 나고, 자식들이 또 그렇게 해야 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이름해서 효도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부 증조모는 천도를 시켰는데 왜 또 하느냐? 쭉 내려가면서 우리 아버지가 천도를 시켰고, 대대로 내려가면서, 그렇다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만 둬도 된다고 하지만은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깨우쳐서 했다 할지라도 위에서 그냥 ‘아! 참 저놈은 참 착하구나’ 내려다 보는 게 있고, 천도가 되기 위해서 아둥바둥하는 시기가 있고, 위 올라가 앉아서 내려다보는 시기가 있다 이겁니다.
지금 부모만 내 부모입니까? 그때 가서는 정말 부처님 자리에 한자리를 했다 할 때는 그렇게 공을 들이고 해서 촛불재를 하고, 백종을 지내고 사월파일에도 그 조상들을 위하는 게 자기를 위하는 겁니다, 결국은. 그렇다면은 높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높은 자리에 가면은, 예를 들어서 하나로 돌아가니까 전부 일체제불과 더불어 일체 중생이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네 자식 내 자식 따질 수가 없고, 네 부모 내 부모 따질 수가 없고, 그런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판사라고 해서 자식들이 나쁜 짓을 해도 그냥 무죄로 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기가 있고, 아래서 허덕거리고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시기가 있다. 그래서 지금 천도시키는 거는 ‘우리 부모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도환생하여 태어나게 하소서’ 하고 정성들이는 겁니다. 그러면은 인도환생이 됐다 할지라도, 인도환생이 돼 가지고 이런 법을 알아서 정말 한자리하게끔 원하는 자식들이 은혜를 갚는 마음이 아주 끝간 데 없이 해야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을 하면 밥 한 번 먹고서 어떻게 밥을 안 먹습니까? 지속적으로 살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배워야 하고, 지속적으로 그 뜻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질문자2: 잘 알겠습니다.
▲질문자3: 스님의 무량광대하고 대자대비하신 법석에 동참할 수 있는 모든 인연과 주인공자리에 한없이 감사합니다. 이처럼 소중한 기회를 빌어 오늘 전부 말씀을 다 해주셨습니다마는 돌에 새기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두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최근에 조상님과 스님, 주인공자리 그리고 제가 둘이 아님을 간절히 느낄 수 있는 새해 맞이 촛불재가 있었습니다. 저희 광주에서도 많은 분들이 동참하여 그야말로 마음의 촛불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예를 들어 질문 하나 올리겠습니다. 가령 삼형제가 함께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일반적으로는 촛불재를 모실 때 어떤 한 분만이, 예를 들어서 큰 형만이 모신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고 또 촛불재도 백중이나 또는 개별적으로 재를 모시는 등 여러 번의 행사가 있습니다만 과연 이런 뜻 깊은 행사를 어떤 형제가 대표로 하는가, 아니면은 한번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법문을 받들고자 합니다.
▲스님: 이 세상에 나올 때 제각기 다 혼자 나오죠? 갈 때도 혼자 가요. 대신 가주는 사람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마음을 밝히는 것도 컴컴한 두뇌를 밝히는 것도 바로 제각기 각자 있는 거죠. 그런데 환경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식구가 오지 못하고 하지 못할 때에 한마음으로서 대신하는 거지, 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대표로 하면 되지’ 이러지는 마세요. 촛불재라는 것은 유위법이나 무위법에서 내가 형성되고 살아나갈 때에 컴컴했던 일을 다시금 내 깊은 마음으로 인해서, 두뇌에 밝은 물리 지혜를 내기 위해서 항상 뿌리가 깊게, 밝음을 스스로서 밝게 진행하도록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들고 켜고 하는 방편이라고 하지마는 방편이자 진실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거나 열심히 뛰는데도 안된다거나 이런 것도 업식에 속하는 거니까, 그것도 본인이 촛불을 들고서 하게끔 만들어 주거나 부모가 해주거나 이래도 훨씬 물리가 터지게 돼 있는 겁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조건이죠. 내가 해놓지 않고 내가 무엇을 받을 게 있겠습니까? 내가 해야만이 한 것만큼 받을 겁니다. 그러니까 촛불재라는 것이 못났든 잘났든, 또는 업보가 많든 업보가 적든 누구나가 다 해야 될 일이라고 봅니다.
예전에 원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뭐 둘이나 되나요? 단 하난데, 그냥 공부를 못해서 남을 따라설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안 자고 공부를 하는데도 그렇대요. 그래서 해마다 촛불재를, 그때도 했는데 하여튼 그 어머니가 그 소릴 듣고 아들의 촛불을 저녁마다 켠 모양입니다. 근데 몇 개월 안 가서 물리가 터져 가지고 그 반에서 일등을 하더랍니다. 이것이 거짓이 아니에요. 내가 한 것만큼 내 앞에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렇게 캄캄했던 두뇌가 그렇게 밝아졌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제각기 촛불재 하는 거는 상당히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여튼 올해는 더 한층 마음으로 점프를 해가면서 할 일을 해가면서 가정을 지키면서…. 불교를 믿는다고 다니는 사람이 그냥 보시만 하는 게 불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살아나가는 것도 다 불사입니다. 다 내 앞을 가리지 못하고 남을 도와준다고 한다면 그것이 욕심입니다. 그러니까 내 앞을 가리면서도 지나가다가 아는 사람이 아프면은, 그런 보살들이 많아요. 옆에 있는 사람이 아픈 걸, 책을 주고 관하라고 말을 해줬더니 관하고 그냥 나아서 고맙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병 나은 거만 알지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면 또 대치를 못 할 테니까 열심히 관하는 도리를 잘 가르쳐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그저 지나가다가 소 한마리의 눈을 쳐다봐도 그 소가 무명을 벗고 요 다음 생에 소는 빨리 또 죽죠. 잡아먹으니까. 허허허. 그러니까 다음에 나오더라도 인간으로, 순하디 순한 눈처럼. 아주 출중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사람으로만 태어나서도 안되거든요. 그 사람의 됨됨이가 진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줘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으로, 생명들을 살리고 있는 이 지구도 수명이 또 길어질 테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공부를 이렇게 하는 거는 여러분만 다니라는 게 아니라 알고 나면은 길 가다오다가도 생각이 나면, 테레비를 보다가도 보시가 되고, 무주상보시가 되는 거죠. 라디오를 듣다가도 무주상보시가 되게 되고, 테레비를 보다가도 ‘저러면 안되는데….’그러면은 그거는 꼭 벌을 받아야 되거든요? 허허허. 그러니까 테레비를 보면서도 법관들이 되시는 거죠. 진짜입니다. 법관들이 되시는 거예요. 그러고 살아나가는 도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냥 절대적인 판사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판사노릇을 한다 하고 그 책임이 있다 하는 생각을 한다면은 생각을 아주 올바르고 투철하게 해야죠. 그냥 아무렇게나 해버리면 아무렇게나 된다면 벌써 우리가 고통스러우니까, 지구가 잘 돼야죠. 지구가 또 패여진 것도 메꾸고 또 그 공기처가 뚫어지는 것도 메꾸고 모든 거를 다 해 나가야 됩니다. 우리는 잘라진 것도 뚫어지는 것도 막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원력이 벌써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있으니깐요. 정말입니다. 이걸 거짓말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성이 그렇게 귀중하다고 하는 겁니다.
※위 법문은 촛불재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