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흠 교수
한양대 국어국문과, 계간<문학과 경계>주간
웜 바이러스 하나에 IT 최강국을 자부하던 나라의 인터넷망이 마비되었다. 2003년 1월 25일은 IT 최강국 대한민국이 얼마나 허울뿐인가를 여실히 드러낸 날이자 전 세계적으로도 정보화사회의 맹점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한 날이다.
인터넷 대란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예전에 추운 겨울 날 가장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가 이불을 빠는 일이었다. 함지박에 담그고 하루 종일 밟아도 구정물은 계속 나왔고 짜는 일도 말리는 일도 보통은 아니어서, 빨랫줄의 이불은 볕이 계속 좋으면 사나흘, 그렇지 않으면 족히 대엿새는 걸려서야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다. 이불 하나 빠는 일만도 이리 어려운 일인데 세탁기와 캐시미론 이불은 어머니와 우리 가족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가? 일손만 덜어준 것이 아니다. 세탁기로 빨래를 돌리는 일은 남자도 할 수 있으니 가사를 공동 부담하면서 가정의 평등이 이루어진다.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사회로 속속 진출하니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였던 가부장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룬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킨 구세주였다. 반면에 세탁기는 소음을 낸다. 중성세제는 강물을 오염시킨다. 여가시간이 엄청 늘었는데도 세탁기 탈수조처럼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니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없다. 양심과 도덕과 정의는 달리기 선수의 발목에 매달린 모래주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로 대체된 노동은 빨래를 하며 오순도순 나누었던 모자간의 대화를, 이불을 밟고 짜면서 부딪혔던 그 살의 부드러움을 허기진 그리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인터넷이란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로 양날의 칼이다. 과학기술에 대해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성찰이 없어서일까? 우리 나라처럼 정보화사회의 역기능은 은폐되고 꿈같은 허상들만 난무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정보화사회는 텔레데모크라시를 실현하여 대중의 정치참여를 고양하고 다양한 의사와 견해를 수렴할 수 있다. 반면에 몇몇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한다면 이 사회는 산업사회보다 훨씬 더 억압이 내재화한 전체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지금 기술로도 빌 게이츠든 부시든 컴퓨터에 칩 하나를 내장시켜 전 세계의 네티즌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 컴퓨터 안의 정보는 물론 우리의 비밀스런 잠자리까지도 빅 브라더가 들여다보고 그의 뜻에 어긋날 경우 ‘O양의 비디오’처럼 인터넷에 공개된다고 생각해 보라. 텔레데모크라시는 꿈일 뿐, 우리는 개인의 사생활마저도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는 파놉티콘의 사회로 가고 있다.
빛의 속도로 거래한다는 것은 빛의 속도로 착취할 수 있음을 뜻한다. 헤지펀드는 우리나라가 IMF사태 때 당하였듯 하루 만에 수백 억 달러를 빼내가 한 나라를 언제든 국가 부도의 위기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자동화가 지금의 추세로 진행될 경우 20%만이 노동을 하고 80%가 실업의 소외와 좌절감에서 나날을 연명할 ‘2 대 8의 사회’를 형성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정보화사회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핵전쟁과 같은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위기의 사회이다.
소 잃은 뒤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낫다. 1월 25일은 정보화사회의 미래를 위해선 오히려 전화위복의 날이다. 국가 전체의 보안 시스템을 마련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것도 미봉책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라도 정보화사회의 역기능에 대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 근본적인 대비책을 마련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