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KBS TV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일본의 유명한 요정인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에 보관 중이던 칠기 장식이 낡아 부산에 살고 있는 전용복이라는 나전장에게 의뢰하여 수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칠기 장식은 조선 나전장이 만든 우리의 문화재였다. 나전칠기 하면 고려가 세계적인 기술을 자랑하였는데,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나전기술로 외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나무에 옻칠을 하여 만든 악기는 이미 원삼국시대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그런데 칠기에 조개조각을 다듬어 붙이는 나전칠기는 통일신라시대에 와서야 가능해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청동나전단화금수문경(국보 140호, 호암미술관소장)이 이러한 역사를 실증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 나전칠기가 화려하게 꽃피운 때는 역시 고려시대이다.
나전국당초문경함(螺鈿菊唐草文經函, 일본 교토 개인소장)은 고려시대 나전칠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함은 세로 25㎝, 가로 47.3㎝, 높이 25㎝의 아담한 크기이다. 조선시대 함과 비교해 보면 뚜껑의 모서리를 경사지게 마무리 한 점이 독특한데, 이는 고려시대의 함에 나타나는 조형적인 특징이다. 양쪽 옆구리에는 손잡이 장식이 달려있고 앞에는 자물쇠를 채우는 장치까지 보인다.
나전칠기의 묘미는 조개껍질의 작은 조각을 조합하여 빛나는 큰 형상을 이루어내는 데 있다. 그런데 이 함의 옆면을 보면 어떤 흐름이 연속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9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국화꽃이 위아래가 어긋난 모양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고, 고사리 모양의 잎이 빽빽하게 난 S자 모양의 넝쿨이 여울을 이루고 있다. 꽃잎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물결이 함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13, 14세기 고려문화가 화려한 장식의 극치를 이룬다고 하지만 이처럼 섬세하게 장식된 나전의 무늬를 바라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어떻게 조개껍질의 조각을 끊고 다듬은 솜씨가 붓으로 그린 것보다 더 정교할 있을까? 이 함은 나전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은 12세기에 고려에 와서 당시의 풍속을 기술한 <고려도경>에서 나전칠기를 ‘세밀하고 귀하다’라고 표현하였는데, 만일 이보다 더 정교한 13, 14세기 나전칠기를 보았다면 과연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진다.
이처럼 화려하게 장식한 함은 어떤 용도로 사용한 것일까? 이 의문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나전국화문경함(12세기, 일본 중요문화재)을 통해서 풀 수 있다. 이 함은 앞의 나전국당초문경함과 형태 및 크기가 유사한데, 뚜껑 윗면에 나전으로 새겨진 직사각형의 제첨에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바로 불경을 보관하기 위하여 나전으로 이처럼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함을 만든 것이다. 이 함만 보더라도 고려인이 대장경에 대하여 얼마나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대장경 간행도 세계적인 위업이지만, 그것을 담은 함 역시 세계적인 예술인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