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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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이야기(1)
자아에 대한 집착·소유 등 부정
印 계급사회 인습타파 위한 가르침

불교의 핵심 가르침에 무아론이 있다. 무아(無我)란 한자를 풀이하자면 내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범어로 나에 해당하는 용어는 아트만이며, 이것에 부정 접두사인 a를 붙여 이루어진 안아트만을 무아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我)를 의미하는 아트만이란 용어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미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으로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트만은 우주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땅에도 물에도 공기에도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전우주를 통일하고 있는 근원적 요소라는 점에서 인도사상의 핵심이다.
아트만은 우주의 통일자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역시 존재할 것이란 점에서는 시간적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아트만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며, 불변의 요소이다. 따라서 아트만이 있기에 인간은 끊없는 윤회를 반복하더라도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트만 이론은 윤회론에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불변의 요소인 아트만이 있기에 인도의 브라만 사회에서는 계급모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브라만, 왕족, 평민, 노예는 이미 각자의 아트만에 의해 결정되어 있어서 어떠한 경우에도 바꿀 수 없다는 사고가 그것이다. 즉 노예의 종성은 노예로, 브라만의 종성은 브라만의 종성으로서 영원한 윤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겁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그것은 수행을 통해 깨닫는 길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에게 주어진 신분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정된 신분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고, 직업의 폭이 정해지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무아설은 이상과 같은 인도사회의 인습과 사고의 한계를 타파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설된 가르침이다. <잡아함경>1권 10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고, 나의 아(我)가 아니고, 또한 나의 본체도 아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 바라봄이 좋다”. 그리고 이어서 감각, 표상, 의지, 의식 등 정신적인 요소에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이상의 경전뿐만 아니라 많은 경전에서 비슷한 설법을 전개하고 있다. 경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께서 무아설을 통해 부정한 것은 대략 세 가지라는 사실이다. 아소(我所)의 부정, 아(我)의 부정, 아체(我體)의 부정이다. 여기서 아소란 아소유(我所有) 즉 나의 소유라는 말을 줄인 것이니 ‘내 것’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나의 소유가 아니다”라 말하는 것은 결국 소유의 고정, 항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나의 것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여난 일이다. 이것은 상식화되어 있는 자기 소유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부정한 것이자 소유에 대한 집착을 배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에 대한 부정이란 당시의 사상가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었던 자아에 대한 사고를 부정한 것이다. 우파니사드의 사상가들은 개인아를 의미하는 아트만을 보편적인 실재자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켜, 우주의 주제자로 간주되고 있던 브라만(梵)과 같다고 보고 범아일여의 사상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가 아니다”라 말하는 것은 절대적 무제약적인 자아의 관념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다.
아체에 대한 부정이란 자아의 불변하는 본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고에 대한 부정이다. 범어 메아타(me atta)를 중국의 역경승들이 아체라고 번역했는데 자아의 항구불변하는 본체가 내포되었다는 의미를 고찰했기 때문이다. 한문에서 몸을 의미하는 체(體)란 글자 속에는 불변의 본체, 본성, 본질을 가리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컨대 육체가 소멸한 뒤에도 영혼이 남아 영겁을 윤회한다고 말할 때는 불변의 본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베다나 우파니사드에서는 아트만(我)이라 말한다. 결국 인도 전통의 윤회설을 전면으로 부정한 것이 아체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그와 같이 보고 분별의식을 멀리한다. 멀리하기 때문에 탐욕을 벗어난다. 탐욕을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지(解脫智)가 생겨서 ‘내 방황의 삶은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행하였다. 이루어야할 것은 이미 다하였다. 이후에 다시 방황의 생을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 깨닫게 된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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