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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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연각 불보살 세계를 알 수 없다
입법계품의 첫머리 부분에는 특별히 주목되는 내용이 있다. 세존께서 사자빈신삼매에 들어서 나타내 보인 여래의 신통력·훌륭한 모습·묘한 행·청정한 세계와 여러 가지로 부사의한 보살의 경계를 서다림에 있던 모든 성문들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그 성문들 가운데에는 사리불·대목건련·마하가섭·수보리·아나율·가전연·부루나와 같은 여러 훌륭한 성문들도 있었다. 그들조차도 마치 귀머거리와 장님 같아서 여래와 보살들의 여러 가지 훌륭한 신통변화에 대해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근이 같지 않고, 부처님을 뵈올 수 있는 자재한 선근을 익히지 않았으며, 부처님들의 공덕과 갖가지 신통과 변화를 본래 칭찬하지 않은 때문이다. 또한 생사에 헤매면서도 보리심을 내지 않고, 다른 이를 보리심에 머물게 하지도 못했으며, 중생들을 거두어 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살의 바라밀을 권해서 닦게 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리고 본래부터 온갖 지혜를 내는 선근을 닦지 않고, 부처님 세계를 장엄하는 신통과 지혜를 얻지 못했으며, 모든 보살의 큰 서원을 내지 않은 때문 등이다.
입법계품에서는 이러한 것은 모두 두루 널리 자비를 행하여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는 보현보살의 지혜로운 안목의 경계이기 때문에 모든 성문과 연각들의 경계가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큰 성문 제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성문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났으므로 성문의 도를 성취하고 성문의 행을 만족하고 성문의 과보에만 머무르려 한다 .그리고 유위법이나 무위법에 대해서는 분명한 지혜를 얻어서, 언제나 진실한 경계에 고요히 머무르며, 중생을 크게 가엾이 여김이 없이 중생을 버리고 자기의 일에만 머무른다. 또한 지혜는 원하고 구하지도 못하고, 닦아 행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을 통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부처님과 보살들의 부사의하고 자재한 신통변화를 볼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입법계품에서 이처럼 대성문들조차도 불보살의 경계를 볼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성문과 연각의 소승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선양하려는 입장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소승의 입장이 무량한 지혜를 구하거나 닦음이 없이 단지 유무(有無)에 관한 지혜를 터득, 청정하고 고요한 경계만을 즐기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이 이기주의로 살아가려는 것임에 반하여, 대승의 입장은 그것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전혀 새로운 차원의 불교라는 것을 강조하는 면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 때문에 화엄경의 교설을 ‘특별히 초월적인 일승을 설하는 가르침[一乘別敎]‘이라고 하는 칭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보살만을 위한 독선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비판도 있었다. 그렇지만 입법계품이 부처님의 철저한 자비정신을 본질로 한 대승불교를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성문과 연각의 입장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들을 배척하기만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문수보살이 보살들과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나려 할 때 사리불 등 육천 명의 비구들이 그와 함께 가기를 원하자 그들에게 설하는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다. 육천 명의 비구는 사리불이 문수보살의 무량한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듣고 대승의 가르침에 눈을 뜨게 되고 그것을 구하게 된다. 문수보살은 그들에게 ‘선남자 선여인이 열 가지의 대승으로 나아가는 법을 성취하면 성문과 연각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여래의 가문에 태어나며, 모든 보살의 소원을 갖추며, 모든 여래의 공덕을 배우며, 모든 보살의 행을 닦으며, 여래의 힘을 얻어 여러 마귀의 경계와 외도들을 굴복시키며, 모든 번뇌를 멸하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여래의 자리에 가까워진다’고 설하고 있다. .
그러자 이것을 들은 비구들이 ‘걸림없는 눈으로 부처의 경계를 봄’이라는 삼매를 얻고, 큰 지혜를 얻으며, 보살의 마음에 확고하게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다시 여러 비구들에게 권하여 보현행(普賢行)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소승의 성문불교를 새로운 대승불교로 포섭하려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전통불교의 성문 연각의 길이 대승 보살의 길로 곧바로 연결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입법계품은 결코 단순히 이승(二乘)을 부정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승의 입장을 비판 부정하고, 대승이야말로 진정한 불교라는 것을 천명하면서도, 그 대승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길이라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교수>
200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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