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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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몽땅 다 태워버릴 수 있어야
가장 쉽게 죽는 방법

저는 주인공에 맡기라는 스님의 법문에 따라 정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아(假我)가 죽어야 진아(眞我)를 본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죽습니까? 죽어지지가 않습니다. 가장 쉽게 죽는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지구의 지축이 흔들리지 않고 부동하게 있는 것이 사방에서 조여드는 자체로 인해서 자석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느 게 하나 붙어도 타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버리는 관계상 살아납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의 혹성입니다. 별성이다 이겁니다. 한 사람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거대한 겁니다. 그렇게 집어삼킬 수 있는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나와서 저울질만 하다 간다면 다음에도 저울질밖에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지 말고 내면을 볼 수 있을 때 홀연히 천리도 눈 앞이다 이겁니다. 조그마한 불씨 하나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이것저것 따지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몽땅 다 태워버릴 건가요? 본래 태워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마음으로 쌓아 놓으니까 그런 겁니다. 무조건이지 뭐를 이렇게 달고 저렇게 달고, 그게 도대체 몇만 근이나 된다고 말입니다.
눈 뜨고 푹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이는 눈을 감고 자는 게 아니라 눈을 뜨고 자야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건져 들어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계산해도 아니 되는 거죠. 그래서 속으로는 똑똑하더라도 겉으로 둔한 척 하는 게 좋은 거예요. 마음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할 수가 없어요. 벌써 오관을 통해서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요. 머리로 다 알아버려요! 감각 지각, 보는 거 듣는 게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요. 거길 통해서 그냥 자기한테 오는 게 있으니 그렇게 오는 수많은, 헤아릴 수도 없는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걸 세겠습니까?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에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모든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다 내 탓입니다. 못난 내 탓이에요.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은 내 탓이죠. 내 탓이라는 그 한마디의 뜻이 눈뜨고 자는 일이라, 가정에서도 언짢은 일이라든가 부부지간이나 부모자식지간 일이라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이익하게 말을 해줄 뿐 아니라 그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굴려서 안에다 놔라 이겁니다.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다시 맡겨 놓고, 공부를 하겠다 못하겠다 하는 것도 다 놔야 돼요. 급하다는 거까지도 놔야 돼요.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나온 자리, 내가 나오기 이전 자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다는 거를 알게 됩니다.

육근작용 지켜보는 수행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스스로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六根)을 운용하여 짓는 결과이니 찰나 찰나로 육근을 동작하는 바가 모두 고로 화하여 진정 고해가 한이 없다.’는 가르침에 따라 육근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육근의 허망함을 관(觀)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수행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 몸뚱이 안의 육근 작용을 지켜보는 수행을 통해서 불법의 불가사의한 도리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는 것은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바라밀이니 팔정도니 하는 거를 일일이 따진다면 너무 어지러워서 방향을 어떻게 둘지를 몰라 공부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공부하는 데 몇 십 년씩 걸려도 빗장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할 것은, 바깥 경계를 여섯 가지 구멍으로, 즉 색(色)을 보는 거, 냄새를 맡는 거, 소리를 듣는 거, 맛을 아는 거, 몸의 부닥침을 아는 거, 의식으로 드는 여섯 가지를 바깥으로 내다보면, 여섯 경계가 바깥으로 한데 합쳐서 나갑니다. 여섯 가지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육근의 이치를 따로따로 보지 마십시오. 눈이 가면 귀도 거기 속해서 가고 냄새도 거기 속해서 가고 맛도 속해서 가고 나한테 접근이 되는 상대도 동시에, 의식으로 드는 것도 동시에 듭니다.
여러 가지가 한데 합쳐서 해야지 여러 가지를 하나하나, 눈 따로 귀 따로 따진다면 언제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일심으로 들어갑니까? 그냥 본래 있는 거니까 눈 가는 데 귀가 가고 귀 가는 데 눈이 간다, 둘이 아니니까 마음으로부터 모두가 한마음이 된 거다 이겁니다. 내 몸에서부터 알려고 하세요. 바깥의 것을 먼저 알려고 한다면 내 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움죽거림이 바로 한마음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한마음에 있으니 몸이 지수화풍으로서 아니 뭉쳐진 게 없고, 지수화풍 아닌 게 없고, 지수화풍이기 때문에 지수화풍으로 이어지는 연관 있는 것이 전부 나 아님이 없다는 겁니다. 몸만 그런 게 아니라 전체 물질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비와 지혜로 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나’라는 게 있기 때문에, ‘나’를 내세우기 때문에 싸우는 겁니다. 나라는 게 없다면, 간단하게 말해서 ‘내가 이 세상에 짊어지고 나온 내 탓이지!’ 이렇게 돌린다면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내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겁니다. 식구들이 마음이 풍족치 못한 것도 우리가 차원이 똑같으니까, 금은 금 방에 가고 넝마는 넝마대로 모이듯이 우리 식구가 차원이 같기 때문에 만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저 ‘주인공, 당신만이 우리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당신만이 우환 병고를 없앨 수 있어.’ 하고 모든 거를, 낫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믿고 맡기고 관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을 찾는 것도 둘로 찾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인공을 찾았는데도 안 된다는 말들을 하는데 그건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벌써 한 다리를 건너가니까 미신 짓이에요. 주인공이라고 이름만 해놨지 그것이 기복하고 뭐가 다릅니까? 내 주인공밖에는 잘 이끌어줄 수 없다는 믿음을 항상 떠나지 않게 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실험하고 거기서 체험하고, 체험함으로써 믿음이 더 단단해지고, 그렇게 되면 불가사의한 법도 거기에서 다 나오게끔 돼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청정하고 청정치 않고를 나누어 분별하지 말고 모든 생각이며 의식들이 다 그 한 자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정말로 믿고 들어간다면 참으로 청정한 한 바다의 맛을 다 보게 될 것입니다.

선가귀감에서

『선가귀감』에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이런 글이 있습니다. 환인 줄 알면 즉 벗어난 거요 따로 방편을 짓을 바 없고, 환을 여읜 즉 각(깨달음)이다, 또한 점차(漸次)가 없는 것이다. 견성하고 나서 그 바른 눈만 올곧이 가진다면 점차적으로 닦아 나가는 것을 부정하신 말씀으로 짐작되는데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일체 만물이 다 환상인 줄만 안다면, 그릇은 비우면 그릇이 되니까 방편을 또 지을 게 없죠. 그리고 “환상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다. 또한 닦아갈 것도 없다.”고 한 건 두말 할 것도 없죠. 그릇을 비워서, 그릇을 비웠단 말조차도 없는데 무슨 거기다 또 말을 붙이겠소? 본래 비어 있는 자리인데, 본래 비어 있는 자리라는 말조차도 없는 건데 서로서로 대화를 하면서 서로가 공한 줄을 알게 만들려니까 대화가 필요하고 방편도 필요하고 그런 거죠. 본래 전부 공한 자리라, 공한 자리다 공한 자리가 아니다 하고 애를 쓸 필요가 없거든요, 사실은. 그런데 그 공한 자리를 공한 자리로 알지 못하고 내가 나라고 하고 환상을 보고, 주인은 모르고 못 보고 그냥 내 것 네 것 하고선 서로 이러니까 보다 못해서 부처님들이 나오신 겁니다. 애들 싸움을 말리려면 어른이 나오듯이. “야! 너도 옳고 너도 옳으니까 고만 두자.” 이러고는 싸움 말리듯이 말입니다. 나중에는 “이놈아! 네가 있으니깐 싸웠지 딴 놈이 싸운 게 아니지 않느냐?” 하고서 일러 줬다는 겁니다.
이 육신이 살아 나가는데 몇 날 며칠이나 살 거 같습니까? 영화를 만드는데 어린애든 어른이든 아슬아슬한 데 막 올라가고 그래도, 떨어져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건 죽은 게 아니라 영화의 그림자이죠? 실제로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데서 떨어져도 겁이 나질 않는 거예요, 그냥 실감나게 볼 뿐이죠. 안 그럴까요? 그렇듯이 지금 살아나가는 이 형체가 바로 그런 셈이나 한가지인 겁니다.
우리가 아슬아슬한 데 올라가서 떨어져 죽게 생겼는데도, 깨우친 사람이 볼 때는 아둥바둥할 필요가 없어요. 떨어져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건 죽는 게 아니니까요, 실상이 아니거든요. 떨어져 죽는 건 그림자지 실상이 아니기 때문에 아둥바둥할 게 없다 이거예요. 이 도리를 알면은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모든 걸 붙잡고 모든 거에 얽매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왜 죽을까 봐 쩔쩔매느냐 이겁니다, 그게 껍데기인데.
사람이 자기를 몰락 버리지 않으면 의정도 없고 의정이 없으면 이루지 못하죠. 보이지 않는 50%를 알 길이 없죠. 그러기 때문에 몰락 버려야 의정이 있고 의정이 있어야 몰락 또 탐지하게 되고 적응이 되죠. 그래서 그것을 다 이해를 하고 돌아간 뒤에 다시 또 의정이 생기게 되고, 의정을 내서 스스로 이건 뭔가 했을 때 그게 또 다시 새삼 이해가 돼서 풀리고 이러다 보니까 세상을 다 집어먹고 말았더랍니다.
그런데 세상을 다 집어먹은 사람은 별나게 생각 낼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본래 내가 기술을 배워서 기계의 모든 걸 다 알 수 있는데, 그 기계는 어떻게 됐을 것인가 하고 또 의정을 내겠습니까? 그러니까 평소 때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그냥 무표정하게 무심으로, 누가 물으면 그냥 “어, 그 기계는….” 하고 무심코 말이 나옵니다. 본래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그 기계는 어디에 나사를 좀 조여 놔.” 이렇게 그냥 무심코 일러줄 수 있는 거죠. 내가 알지 못하고는 일러 줄 수가 없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알지 못하면 중생이고 알면 부처라는 말과 같은데 우리가 평소에 하던 일은 훤합니다. 훤하기 때문에 그걸 일부러 생각하면서 알 양으로 의정을 낼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여지껏 해 나오신 거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그냥 무심코 쑥쑥 말해 줄 수 있는 그 성품 말입니다. 고게 바로 본래면목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알지도 못하고, 가량도 못하는 사람들이 체험을 해서 말씀해 놓으신 걸 가지고 응용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엇갈릴 수밖에요. 그렇게 응용을 하고 있으니까, 체험을 못 해 본 사람이 남의 말을 가지고 응용을 하다 보니까, 체험을 안 해 봤으니까 “이러이러하다더라.”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러이러하다” 하고 자기 걸로 그냥 말한다 이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체험을 못해 봤으니까 가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만 했을 뿐이지.
만약에 내가 남의 소리를 듣고서 “몰락 놔 버리고 이렇게 해라.” 이런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의 힘이기 때문에, 말의 힘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것은 안 됩니다. 경험해 보지 않고 절대 말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론으로 수행은 할 수 있을지언정 마음을 깨닫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사람만이 부처 되는지…

항상 이끌어 주시고 바른 길로 가도록 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을 가다 의문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모든 생물들은 불성이 있어 그것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가 부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지요? 모두가 부처인데 왜 인간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고 인간이 되어야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지요?

지금 고생이 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수 억겁을 거쳐오면서 얼마나 쫓고 쫓기면서 이렇게 인간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짐승의 몸으로 한번 태어나 보세요.
만약에 사람의 모습을 떠나서 소의 모습으로 태어났다거나 한다면, 소의 모습으로 살았던 관습이라든가 습성이 그대로 남아가지고 그 모습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 거듭거듭 소로 태어나는 거죠. 또 돼지로 태어난다거나 뱀으로 태어난다거나 해도 그 모습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상당히 어렵다는 얘깁니다.
뱀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나가다 보면은 뱀이 사는 의식을 가지고선 수차적으로 갔기 때문에 그 의식, 습이 아주 박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빠지기가 어려워요. 우리가 깡패 소굴에 들어가서, 나쁜 일을 해서 잡혀 들어갔다고 합시다. ‘인제는 좋은 생각을 하고 좀 사람답게 살아봐야겠다!’ 하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벌써 거기 지키고 있습니다. “이리 와! 할 일 있어.” 안 하면은 죽이는 겁니다.
이렇게 빠질 수가 없듯이, 뱀의 소굴에 들어가거나 개구리 소굴에 들어가면 그대로 물이 들어서 빠져나오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새끼들을 낳아놓는 것은 자기 인과에 의해서 그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숫자대로 낳은 거죠. 숫자대로 낳았으니 그 숫자대로 낳은 그 속에 또 인과가 들어 있어 숫자대로 또 있으니 어떡합니까, 글쎄. 그게 헤아릴 수가 없죠. 습이 붙어 가지고 그 무명을 벗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천년 만에 한 번 벗을지 말지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헤어나질 못하고 죽었다 하면은, 벌써 그 모습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헤어나질 못하고 그 아버지 어머니한테 응신을 하게되죠. 그러니 그 모습에서 떠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 몸 받기도 그렇게 어려운데 사람의 몸을 받아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전부 따지고 본다면 부처님들인데 부처님 아닌 게 없는데, 한생각에 그만 부처님의 도리를 상실하고 중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한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태산 준령을 넘을 수는 있고 뚫을 수 있을지언정 내 백지장 하나를 뚫지 못하고 넘지 못해서 우리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좀 더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거름으로 바탕을 삼아서 노예가 돼서도 아니 되고 무조건 남이 하니깐 하지 마세요. 될 수 있으면 나의 마음을 따르고 공존하고 있는 한마음의 주인공을 믿으세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그것이 둘이 아닌 까닭에 주인공이라고 했거늘 어찌 주인공을 떠나서 자기를 떠나서 부처님 법을 익히겠습니까?
그렇기에 인간 몸에서 벗어나야 인간을 굴리죠, 자기를 굴리죠. 그 많은 중생들이 자기 몸 속에 있는데 말입니다. 그 많은 의식들을 다 한마음으로 몰고 가려면 그래도 그 속에서 나오는 것쯤은 그 속에다 넣을 줄 알아야 되죠. 하인을 부려도 똑똑히 부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라면. 여러분이 부처라면 바로 부처는 한생각을 내서 법신으로서, 보살로서 중생들을 보살로 만들려면 한마음으로 굴리고 리드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으로써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화해서, 즉 말하자면 입자가 분자가 되고 분자가 보살이 돼서 수 없이 헤아릴 수 없는 보살들이 털 구녘을 드나들면서 삼십이응신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고, 누가 어떠한 말을 해도 그냥 한 찰나에 드신다고 그랬습니다.
일체가 여러분 마음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체를 무시하지 마시고 여러분 육신 안에 들어있는 중생들을 딴 나무로 보지 마세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미생물에서부터 올라온 그 과정을 모르거든 속을 들여다봐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있는 데서 공부를 하는 거지 내가 없는데 무슨 공부를 합니까? 그러니 큰 거부터 알려고 하지 마시고 나부터 알면은 모든 물리가 터지게끔 돼있습니다.

화를 많이 내는데…

저는 평소 화가 많은 편입니다. 스님의 말씀 따라 모든 화가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만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특히 직장의 부하직원이 버릇없게 굴 때는 거의 참지 못하고 화를 폭발시키면서 앞으로 좋은 기회가 있어도 절대로 도와주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이 마음이 잘못됐다고 생각되면서도 과연 버릇없게 구는 부하직원에게 좋게만 대해주는 게 도움을 주는 것일까 갈등이 생깁니다. 만약 보복차원이 아니라 부하직원의 마음을 조약돌처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잠시나마 냉정하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 혼란스럽습니다. 특히 아랫사람이나 후배가 버릇없이 굴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항상 갈등을 느끼고 제대로 대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미운 사람은 미워하고 이쁜 사람은 이뻐하는 게 부처님의 자비가 아닙니다. 그래서 ‘보살은 이쁜 사람은 이쁜 사람대로 살리고 미운 사람은 미운 사람대로 살린다’ 하는 뜻이, 여러분이 부처가 됐다 하더라도 부처가 되기 이전에, 수 억겁을 거쳐 공부하면서 나올 때에 뭔 짓은 안했겠습니까? 과거에 강도질을 했는지 살인을 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 몰랐을 때 내 모습으로만 본다면, 지금 내가 배우고 가는 기준으로 보지 마시고, 항상 자식들도 내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탈이 나는 겁니다. 자녀들 속에 들어가서 한마음이 된다면 폐단이 올 일이 없습니다.
제각기 모습이 다르고 차원도 다르지만 모든 그 마음들은 본래부터 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본래부터 잘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나오다 보니까 물질에 끄달리고 먹고사는데 끄달리고 애착에 끄달리고 욕심에 끄달리다 보니깐 잘못된 거지 애초부터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자기가 부처님이 되기 이전에 어떻게 굴러왔다는 거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모두가 얕은 것도 높고 높은 것도 높고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도 보고 상대를 통해 일어나는 마음 양면 가운데, 내 마음을 잘 다스려서 놓을 줄 알아야만이 참선이 될 수가 있다, 즉 말하자면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고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데, 아버지가 됐을 때 아버지라고만 고집하면은 아들 노릇은 어떻게 하며 친구 노릇은 어떻게 하며 남편 노릇은 어떻게 하느냐 이 소립니다.
그와 같이 천차만별로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거를, 그냥 척 놨을 때에 일하면서도 편안하고 가도 편안하고 앉았어도 편안하고 똥을 눠도 편안하고 이래야 좌선이자 참선이 되는 겁니다. 생활에서 오는 고통에서 허우적거리지 마시고 그 고통이 어디서 온 거를 안다면…. 뜨거운 것을 알아야 시원한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 고통이 어디서 온 거를 안다면 대치를 시원하게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디서 온 걸 모르니까 허우적거릴 수 밖에없는 겁니다.
그렇게만 행한다면 스스로서 성내는 마음이 없어지고 악한 마음이 없어지고, 내 마음 자체가 스스로서 돌아가니까 남들한테 한마디를 하더라도 선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선한 말이 나가거든요. 그러면은 모든 사람들이 선하게 가라앉지만 만약에 한생각을 선하게 안 냈다면, 그냥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말도 잘못 나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부 불뚝불뚝 화를 내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속이 상해 보세요. 속을 끌이면 얼굴이 찌푸려지지만 마음이 편안하면 언제나 싱긋이 웃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스마일이지요, 스마일! 부처님의 상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오관이 다 스무드하게 웃고 있으면 마음도 해말갛게 웃기 때문에 거죽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거지 속에서 웃지 않는데 어떻게 거죽으로 웃음이 나오느냐 이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속에서 썩은 거는 바깥으로도 악취가 나지만 속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면 아름다운 향기가 풍기기 때문에 누구를 대하든 선하게 웃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 부처님 법이라는 게 따로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부처님 법이 주어지는 거죠.
아무리 아래 부하직원이라 할지라도 서로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도록 해야지 말로 하는 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거죠. 화를 자주 내는 건 상대방에게 피해가 가는 거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더 좋지 않다는 걸 알아야죠. 가정에서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화를 내지 말고 한생각을 선하게 내어서 모두를 따뜻하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심약멸시죄역망에 대해

『천수경』에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亡”이란 글이 있습니다. 여기서 “심약멸시죄역망”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죄가 마음에서 일어나 이미 물리적인 결과로 나타났을 때, 예를 들어 누구를 다치게 했거나 물건을 훔쳤을 때 마음만 청정해진다고 죄의 결과가 갑자기 없어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냥 말로 알아서 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일체 만법이 다 나한테 부딪치고 돌아가는데 내가 공한 걸 안다면, 부처님께서 이날까지 말씀해 놓으신, 내가 공한 줄 알아서 마음이 청정하면 죄 또한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공했는데 무슨 업보가 거기 붙겠느냐는 거죠. 저 사람도 공했고 나도 공해서 내가 한 행위도 공한 줄을 안다면 무슨 업보가 거기 붙고 인과가 붙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생이라는 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전생이라는 걸 붙이지 말라 이거예요. 왜? 전생에 살던 습성을 내가 지금 현재에 가지고 있고 불성이라는 건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건데 구태여 왜 그거를 업보다 인과다 하느냐 이거예요. 그리고 무슨 조상의 탓을 하질 않나, 또 부모가 어떻게 해서 잘못됐다고 자식들이 부모를 원망하는데 참내! 그런 거를 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내가 낳기 이전도 조상이고 부모가 낳기 이전도 조상인데 그 조상이 둘인가요? 부처 낳기 이전도 조상인데…. 그런데도 조상 탓을 한단 말이에요.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우리 애 아버지가 뱀을 자꾸 잡아먹는데 어떡합니까? 절에 다니는 사람이 개 한 마리도 잡아먹으면 업보가 된다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러길래 그 말끝에 그랬어요. “그건 자기가 자기를 먹는 거다.”그러니까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스님, 그렇다면 정말 업보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날더러 묻지 말어. 둘이 아닌 도리만 알면 돼. 그리고 남편을 원망하지 말아. 남편이 그거 잡아먹었다고 우리 집안은 업보에 휘감겨서 못 산다.”고도 생각지 말고 살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거는 남편이 몸이 좀 시원치 않아서 그런거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얘기를 했을까요?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이에요. 그 도리를 알라고 얘기를 했는데 얼마 안 있어서 다시 와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인제 시원합니다. 애 아버지가 글쎄 그걸 안 먹겠대요.” 이러거든요. 아무리 잡아먹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시원한 마음이 돼야 되는 거죠. 그래서 “거봐, 자연히 안 먹어져야지, 업보가 된다고 그걸 억지로 그러면 벗겨질 수가 없어.” 그러니 얼마나 그게 간편하고 좋아요?
그러니 업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업보가 되는 거고 인과라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인과가 되는 거고, 또 살생이라 한다면 한없이 살생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는 거를 가만히 보라고요. 모든 것이 살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업보를 안 지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업보라고 이름지어 가지고 왜 업보를 받느냐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업보가 아니다 이거예요. 몰라서 그러는 거지, 업보가 아닙니다. 성장하는 수행 과정이죠. 안 그렇습니까? 모르는 사람한테는 업보가 되지만 그 도리를 알고 자기로 보는 사람에게는 업보가 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 잘 되려고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자기에게 불어닥치는 일들이 모든 게 수행할 수 있는 재료이니까 그걸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모든 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나는 “저 사람이 난데 저 사람 죽으면 어쩌나?” 이러지도 않고, “내가 만약에 죽으면 어쩌나?” 이러지도 않아요. 또 내가 오래 살아야지, 저 사람이 오래 살아야 한다고 그러지도 않아요. 내가 그럴 거 같으면 이 세상에 아마 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우리가 모습인데 모습이 허망하고 쓸모 없고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과정을 거쳤고 그만한 수행을 해서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됐고 그 부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부처님을 그렇게 위대하게 볼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거죠. 만약에 내가 모습을 안 가지고 나왔고 허망한 거라면 그건 말도 안 돼요.
이런 말을 그냥 아무렇게나 한다고 그러지 마세요. 단 하나, 그저 남들한테 가볍게 해주고 인의롭게 해주고, 또 죄 있는 마음을 가졌을 때 죄 없는 마음을 넣어주자는 겁니다. 말 한마디에 부처님의 뜻을 받아서 그대로 한데 떨어뜨리지 않게 심부름을 잘 해야겠다, 그러면 부처님과 나와 둘이겠는가? 그 뜻이 바로 내가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내 몸도 나툼이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나툼인 것이죠. 어디 나툼 아닌 게 있나요? 벌레 하나도 난 버리고 싶지 않아요. 왜? 부처님의 나툼이니까 말입니다.
200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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