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기에 누구를 원망할 게 하나도 없어
<404호에 이어>
▲질문자1: 제가 신선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역설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쭙고자 하는 것은, 우선 지금 제가 처해 있는 상황이 힘이 드니까 신선을 역설적으로 말씀을 드렸는데요, 결국은 왜 이렇게 내가 힘들게 나왔는가 하는 점을 좀 여쭙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님: 그러니까 내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게 입력이 돼서 지금 현실에 하나하나 나오는 거니까 그걸 해결 못하면 건건이 끄달리면서 그냥 살게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은 자기가 벌려놓은 거니까 자기가 해결을 해야지 누가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하게 나오는 것도 자기가 지어 놓은 것이요, 못나게 나오는 것도 자기가 지어놓은 것이요, 짐승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도 모두 자기가 지어놓은 것이고, 개의 모습을 가지고 나오는 것도 자기가 지어놓은 탓이고, 부자로 사는 것도 자기가 지어놨기 때문에 지금 부자로 사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하고 자기가 받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할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것이 닥치면 닥칠 수록 그것을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알고 ‘내가 다 지어놨으니까 나오는 거지, 이게 다 공부할 수 있는 재료구나.’ 하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거기다가 놓고 간다면 다시금 그게 바뀌어지는 겁니다. 운명이나 팔자나 영계성·세균성 또는 업보성·인과성이 다 몰락 그냥 없어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알고 보면 바로 지금 하나하나 없애고 가는 길입니다, 모두.
▲질문자1: 예. 제가 스님의 말씀을, 지금 현실에 다가오는 어려움을 오히려 수행의 재료로 삼아서 공부해 나가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스님: 예. 사실인 걸요, 뭐.
▲질문자1: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은, 어느 도인의 말로는 우리나라에 세계적으로 뛰어난 인물감이 태어나기는 해도 이 땅이 권력상쟁의 기운이 있는지라 우리 한국 사람이 한국의 인물을 죽여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렇고 세상을 살아보아도 그렇고, 나라를 망치거나 사업을 실패할 때도 적이나 경쟁자보다는 같은 민족이나 친한 사람의 해침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구나 한국 사람은 이런 점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특히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친한 사람들끼리 해치려는 마음이나 시기심이 더 강한지, 또 이런 국민성이 우리에게 있다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요?
▲스님: 그런데 그건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는데요. 한 가지는 국민성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물질로만 치닫고 있기 때문에 정신계의 너그러움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사람도, 능히 해나갈 수 있는 사람도 오히려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바깥으로 나서지를 않습니다. 보배는 오히려 바깥으로 나서지 않는 법이에요. 그래서 그걸 찾지 못하고, 만약에 나섰다 하더라도, 어떤 인연으로 인해서 치워져 버리는 이런 문제가 있구요.
또 하나는 우리가 어떠한 관계상 이 마음공부를 해서, 우리 한국만 하더라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아까 얘기했죠. 내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러 나가서 떡 먹는 얘기를 했습니다만, 중국의 왕이 ‘음, 조선을 치면 내 나라가 망하겠구나.’ 했다는 소리 말입니다. 그걸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 뜻이 안 돌아갑니까? 고개짓을 하시게요. 그러니까 그거와 같이 생명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각 세계로 비추어볼 때 전력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디든 전력은 다 통하게 돼있어요. 어떤 거든지 끌어써도 전력은 전력대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내 마음의 불 바퀴는 그대로 세계적으로도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내 불 바퀴와 상대의 불 바퀴가 한데 합치면 둘이 아닌 불이죠. 그러니까 어떠한 나라를 막론하고, 또 우리 국내에서도 그렇게 될 것을 희망하면서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겨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너만이 사람을 찾아서 할 수 있는 거지 딴 데서는 할 수가 없어. 모두 물질계로 처참하게 그냥 올라가려고만 하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 밟으면 또 떨어질 건데도 불구하고 그냥 올라가려고만 하기 때문에 안 되니까 너만이 그렇지 않게 할 수 있어.’ 하고 모든 마음들을 한데 합쳐서 기울여보시면 중국의 왕이 말한 뜻이 아마 나올 겁니다.
▲질문자1: 결국은 한마음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게 극복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스님: 그렇죠. 그렇게 해서, 아까도 얘기했죠. 평등 공(平等空)의 법이라는 것은 철퇴가 들어갈 수도 있지만, 선지식들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전부 한손이 돼서 응시해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질문자1: 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는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에서 중국의 사업가가 한국 사람들이 신용이 없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비난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에 대한 이런 류(類)의 이야기는 비일비재합니다. 스님께서 좋은 거짓말은 나쁘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만 일부의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나 가족 혹은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 예사로 거짓을 말하면서 스님의 가르침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신용이 없다고 비난받는 사람들이 스님의 말씀에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면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외국에서도 신용이 없다는 평판을 받는 한국 사람에게 굳이 그런 말씀을 들려주신 까닭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스님: 애는 애 노릇을 하고 어른은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누가, 어른 노릇을 해야 할 때 애 노릇 하라고 그랬습니까, 애 노릇을 해야할 때 어른 노릇을 하라고 그랬습니까?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뭘 뜻하느냐하면 만약에 부모가 속이 상해서 병이 들까 봐, 자기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거짓말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효(孝)이기 때문에 거짓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 거짓은 거짓이 아니라는 거죠. 또 자식들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분 계세요? 다 못 하고 사시죠? 그게 거짓 아닌 거짓이면서도 아주 뜻이 깊은 작용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요,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게 아니라 거짓 아닌 방편의 거짓말을 하라고 하는 거죠.
▲질문자1: 네. 스님께서는 그런 뜻에서 말씀하셨지만 특히 아직 어른이 되지도 않았는데 애가 어른이 다 됐다고 우기는 그런 입장이라면 안되지 않습니까?
▲스님: 그러면 그거는 안 되죠. 왜냐하면 “부처가 돼도 나는 부처가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왜냐? 여러분 몸 속에 중생들이, 생명들이 많이 들어있는데 밥을 먹었다고 해서 혼자 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자1: 더불어 먹었습니다.
▲스님: 더불어 먹었죠?
▲질문자1: 예.
▲스님: 그러니까 내가 밥 먹었다 그러고 내세울 수 없는 거죠.
▲질문자1: 예. 그렇습니다.
▲스님: 그래요. 모든 게 그렇죠. 밥 먹는 거 하나만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만나는 거, 사는 거, 먹는 거 모두가 다 그렇죠. 그래서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천차만별이 다 그렇게 나투고 돌아간다 이렇게 말을 했죠?
▲질문자1: 예.
▲스님: 그랬으니 그렇게 닥쳐오는 대로 할 일을 해야 하고 안 할 일은 안 해야 되는 거고, 내가 내세울 게 뭐 있다고 안다고 그러겠느냐 하고 고개를 숙이는 겁니다.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명들이 다 내 마음에 의해서 작용을 하고 있는데, 내 마음의 선장에 의해서 작용을 하고 있는데, 만약에 ‘나’라고 한다면 속의 생명체들이 ‘흥, 네가 했다고 하고 네가 안다고 한다면 실컷 알아봐라, 실컷 해봐라.’ 이러구선 작용을 안 해줍니다. 그러고 자꾸 빗나가게끔 되죠.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세우지 않는 게 부처님들의 목적이에요. 그래서 여래라고 하는 것은 내 몸뚱이 속에, 방편으로 표현을 하자면, 내 몸뚱이 속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있으니 내가 혼자 있다고 세울 게 없는 것이 여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1: 감사합니다. 제가 또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의 질문하고 약간 연관이 있습니다. 때때로 스님께서 가르치는 생활의 여러 방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심한 경우에는 몇년 간의 마음공부가 수행하는 데에 오히려 방만과 자만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계율에 걸리지 말라.’고 하니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지나쳐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술도 그렇고 다른 여러 가지 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것을 자제하자고 말하고 싶어도 왜 걸리느냐는 상투적인 반응이 싫어서 아예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너무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난감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매사에 걸리지 않는 자재로움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은근히 그것을 자랑하고 권하면서 스스로 그런 것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스님의 말씀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고, 스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시다면 거기에 대해서 다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스님: 그러죠. 애가 갓 태어나서 씹어먹을 이가 하나도 없는데 고기를 줘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깐 못 먹는 사람은 먹지 말아야죠. 그러고 어른은 씹어먹을 수 있으니까 먹을 수 있는 거구요.
그거와 같이 마음공부를 진짜로 하면서 그 자리에 맡기고 진짜로 물러서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대해서는 먹는 것이 그 무명을 벗겨주는 일이지만 그런 마음의 요리를 못하는 사람에게는 살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양단간을 놓고 어떤 것이 옳으냐 이런다면 어떤 게 옳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살생이 되니까 먹지 말아야 하고, 이건 무명을 벗겨주니까 먹어야 하고 이 둘 중에 어떤 것으로 나가야 됩니까? 그러니 먹는 것도 안 먹는 것도, 즉 말하자면 어린애는 먹지말고 어른은 먹으라는 건데, 먹되 무명을 쓰고 그 애탄지탄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먹으라는 겁니다. 그 몸뚱이의 살점 하나를 사람이 먹기를 바라면서 천년을 기다리고 있는 생명이 있다 이겁니다.
왜 그게 벗어나기가 힘이 드느냐 하면 소로 살았으면 소의 습성이 잔뜩 붙어서 그 영도 사람으로 가지 않고 소로 갑니다. 그래서 소를 면치 못해요. 개도 그렇고 다 그래요. 그게 한찰나 알았으면 훌떡 뛰어넘으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그 무명을 벗지 못하고 세세생생 그 모습을 쓰고 허덕이는 것이 바로 짐승들의 사연입니다.
짐승들도 공부를 하는 짐승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살점 하나 우연히 참, 선승(禪僧)들이 한 점 잡수기를 원하고 원하면서 그렇게 염원하고 있는 거죠. 그러고 짐승들도 생명을 죽이지 않으면서 풀 이슬만 먹고 사는 짐승들도 많습니다. 소가 왜 살생을 하지 않고 여물만 먹고 삽니까? 우리 인간도 잘못 하면 소로 태어날 수도 있고 잘못 하면 독사로도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반복돼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왜 이런 공부를 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무명을 벗겨주기 위해서….
▲질문자1: 스님께서는 먹히는 그 고기나 먹는 사람도 다 방생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스님: 아이, 그러니까요. 이걸 이렇게 들으셔야 돼요. 그러니깐 자유죠. 먹을 만한 사람이 먹든지, 먹을 만하지 못한 사람이 먹든지 그건 너희들 생각대로 해라 이겁니다. 지혜롭고 아주 틀림없는 사람들 같다면 모든 걸 거기다 맡기고 먹되, 옛날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산간 절에서 스승이 다 죽게 됐는데 제자가 생각을 하니 어떻게 병을 낫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분에게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호미를 들고 통을 들고 나갔어요. 지렁이를 수없이 잡아서 그냥 푹 고아가지구선 그거를 체에다 받쳐 가지고 “지옥엘 가도 내가 갈 테니까 지옥을 보내든지 마음대로 해라.” 하고 그냥 갖다가 드리니까 “이게 무슨 물인데 이렇게 맛있니?”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풀뿌리를 고은 물입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고 병이 다 나아서 아주 건강하게 도로 다니시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풀뿌리라고 했던 그 제자는 지옥에 갔겠네요?
그러니 예를 들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것은 거짓 아닌 거짓으로 효(孝)가 된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지금 자기가 죄를 받고 죄를 안 받고 그걸 떠나서 오직 자기 스승을 살리기 위해서 그 생명체들을 다 죽였다면 그건 죽인 게 아닙니다. 그냥 곧바로 인간으로 환생이 전부 된 거죠.
왜냐하면 닭을 수십 마리를 죽였는데 닭 마음을 한데 합치면 하나가 돼요. 아시겠습니까, 그 뜻을? 닭 수효대로 닭이 나가는 게 아니고 사람이 사람으로 화(化)하는 게 아니고, 닭 30마리면 30마리 한데 합쳐서 한 마리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들면 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지렁이가 수십 수백 마리라 해도 그것은 한 사람으로 인간 환생을 시킬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착한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부처님의 손들이 다 응신(應身)으로 화(化)해서 응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그게 천가가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 모르는 사람한테는 살생이지만 그건 살생이 아닌 것이죠.
▲질문자1: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옛날 경허스님은 무애행(無碍行)을 많이 하셨다지요. 또 얼마 전에 열반에 드신 성철스님은 그 입장을 조금 배척하신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경허스님의 무애행 그 자체는 긍정을 하시지마는 일반 대중들에게 비쳐지는 데는 어떤 경계심을 가지고 무애행을 권장하는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이셨던 것 같아요. 제가 알기로는요.
▲스님: 그게 두 가지로 요약돼요. 그거를 자기가 알더라도 중생들에게 비쳐서 나쁜 영향으로 누(累)가 되지 않게 하지 그랬느냐 하고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셨겠죠.
▲질문자1: 네.
▲스님: 또 한 가지, 경허스님께서는 너희들이 그렇게만 생각해서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거를 보고 뛰어넘어라 하구서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어 들어 보이시고) 든 겁니다.
▲질문자1: 예.
▲스님: 그러니까 어떤 것이 높으냐 하면 다 똑같습니다. 다 똑같애요. 다 똑같으니까 피장파장이에요. 뛰어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도 있고, 또 하나는, 왜 자꾸 모르는 사람들에게 누(累)가 되게 비치게 하느냐 걱정하시는 거고, 그러니까 다 똑같습니다. 그 마음은요.
▲질문자1: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스님: 이 마음의 길을 걷지 않고는 그 도리를 모릅니다. 모두 몰라서 내가 이런 대답을 해도 ‘뭐 그게 마땅한가?’ 이러겠지만 사실이 그러니까요. 뼈다귀를 들고 술을 바리때에다 담아서 들고, 뼈다귀 든 거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 건지고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됐고, 하나는 수레바퀴처럼 모든 중생들이 다 이렇게 찰나찰나 물처럼 돌아가느니라 하는 거를 보여준 겁니다. 물이 수 없는 중생들에게 양식이 될 수 있지마는 크게 뜻을 본다면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치를 가르쳐주는 바리때예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공부요, 공부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도리를 아신다면 여러분도 이 세상을 살면서 쓰다 달다 생각 없이 참 그대로 그냥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나처럼 말입니다. 하하하….
▲질문자2: 스님, 오늘도 이렇게 뵙게 돼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질문할 요지를 다 잊어버려서 마음에서 그대로 나오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전번에 질문 드릴 때도 말씀드렸지마는 머리로 아는 것보다 단 한 자라도 마음으로 알아야 된다는 게 제 진실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상반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백이냐 흑이냐 그러는 제 마음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을 때에, 부정적인 것은 ‘저것은 아니야.’ 그러고 ‘그저 놔야 된다.’는 이런 마음이 생겼는데,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은 그것까지도 다 수용해야 되지 않느냐는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에서 그것까지도 다 받아들이지를 않아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거기에서 약간 맴돌고 있기에 그거 질문하러 나왔습니다.
▲스님: 긍정적인 일은 해야죠?
▲질문자2: 네.
▲스님: 네, 그런데 부정적인 일은 하지 말아야죠?
▲질문자2: 네.
▲스님: 그렇게 벌써 자신이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하는 걸 벌써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질문자2: 네.
▲스님: 그게 묘법이죠, 그 알고 있는 자체가. 그러니깐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안 하게 되고 알고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긍정이다 부정이다 하는 게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지 두 구멍에서 나오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나오는 대로 긍정적으로 나오는 거, 이렇게 긍정적으로 나오는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은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도 너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긍정적으로 나오게 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놔라 이 소리예요. 한 구멍에다가 놓으세요! 누가 좋은 거만 하라는 게 아니에요.
▲질문자2: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그 말이 그 말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서 마음공부의 일차적인 목적은 선행하는 데 있다 그러는데, 예를 들어서 선행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 뒤에는 악행이 뒤따른다는, 상반된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기에, 제 마음에서는 항상 제가 판단했을 때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옳은 길이면 가면 된다.’는 이런 마음을 먹고 있지마는,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이 선행이 있으면 악행도 있는데 선행과 악행을 다 받아들여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요.
▲스님: 이거 봐요. 받아들이라는 이치는 나쁜 사람이 나한테 접근을 해올 때, 접근을 했다, 접근을 하러 온다, 망하게 만들어졌다 하는 이런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이 소립니다. 왜냐? 전력이 똑같듯이, 비유해서 전력이라고 생각하면, 전력이라는 것은 똑같아요. 나쁘게 하는 사람이나 좋게 하는 사람이나. 그러니까 천리 만리도 멀다 하지 않고 마음이 전달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 주인공에 모든 걸 다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도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할 때에 그 마음과 통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응신이라고 그러죠. 만보살(萬菩薩)이 응신으로 화(化)해서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대로 응해주신다, 나투어 주신다 이겁니다. ‘나투어 준다’ 하는 거는 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의사가 돼주고, 좋은 데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한테는 지장이 돼주고, 또는 얼마 못 살고 죽겠어서 좀더 살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칠성이 돼주고, 이렇게 나툰다는 말입니다. 딴 걸로 화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고 가지 않습니까?
▲질문자2: 네.
▲스님: 자꾸자꾸 바뀌어서 만나고, 바뀌어서 말하고, 바뀌어서 듣고, 바뀌어져서 보고, 발자국을 떼어놔도 딴 데를 자꾸 딛고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거와 같이 모든 것이 그렇게 해서 해결이 되는 겁니다. 이쪽에서 그것을 받아서 잘못되는 그 자체가 잘 되게끔 연결이 돼서 차차 자꾸 잘 되거든요. 야비하게 하는 사람도 야비하지 않게 마음이 되죠.
그래서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건지라는 겁니다. 악한 거를 버리게 되면 또 인과가 돼서 따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선과 악을 그냥 몽땅 다, 하나는 감사하게 놓고 하나는 그냥 되돌려 놔라 이겁니다. 남이 그르다 하더라도 자기 주인공에다 들이대고 ‘너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잖아. 그 사람이 본래 나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깐 그렇게 해.’ 하구서 자기 주인공에 놨을 때에 그 사람도 마음이 변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건져야죠. 그러고 그 뒤에 말 한마디 또 할 거는 뭐냐 하면, 우리가 녹음을 할 때 차례차례로 녹음을 하죠? 차례차례 녹음한 대로 먼저 한 거부터 나오죠. 그러고 나중에 한 거는 맨 끄트머리로 나오죠. 그렇듯이 여러분도 과거에 지은 대로 녹음이 돼서 차례차례로 쌓여져 있다고 할까요? 쌓여진 것이 차례차례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차례차례로, 업이 많이 쌓인 사람이 있고 적게 쌓인 사람이 있는데,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딴 사람은 저렇게 잘 되는데 나는 왜 그렇게 안 됩니까.” 하고 오는 사람한테는 다른 말 없이 “정성이 지극하면 돼.” 이렇게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업이 너무 쌓여 있으면, 잘 놓아서 모두 다 녹아야, 그렇게 나온 제자리에다 되놔야 앞서의 입력된 게 자꾸 없어지면서 줄어들게 됩니다. 그게 거반거반 다 됐으면 속으로 ‘어, 인제 거반거반 다 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속으로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빨리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지말고, 나쁜 고(苦)가 쌓이고 쌓인 악업들이 모두 차례차례로 없어지려면 좀 인내가 있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고, 실천적이고 평등하고, 이해성 있고 지혜롭고 이래야만이 그거를 무난히 다 폐지시킬 수가 있죠. 새로 좋은 마음으로 입력된 게 나올 시기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질문자2: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님: (삼배를 올리는 질문자에게) 삼정례(三頂禮)를 일정례(一頂禮)로 포함해서 하나로 합해서 하면 좋아요. 아주 자유스러운 법이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법이거든요. 허허허.
▲질문자3: 세상에 부모를 모시고 있는 어느 자식 치고 부모님의 병환에 대해서 근심 없는 자식은 아마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얼마 전 저희 아버님께서 모 대학병원에서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남들을 위해서 여지껏 살아오시면서 좋은 일도 많이 하셨고 옳게 살아왔다고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옳게 살기를 항상 말씀해주시고 그러셨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저희 아버님께서는 지금 육신의 집을 고치기 위해서 투병을 하고 계십니다. 스님, 저희 모두에게, 저희 아버님에게 한마음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렇게 하신다면 아주 다른 거는 말고라도 내 깊은 마음 속에 ‘주인공 뿌리야, 너만이 네 몸뚱이 병을 고칠 수 있어.’ 하고 그거 한 마디만 관(觀)하라고 그러세요. 그러면 꼭 접근이 될 겁니다. 통신이 돼야 됩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