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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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각스님 (下) (끝)
해제·결제 가리지않고 정진
포교당일 솔선…힘들때마다 격려

영각스님은 배울 점이 많은 스님이다. 옆에서 지켜보면 정말 열심히 정진한다. 평소에도 늘 정진하다가 잠이 들고 먼저 일어나 정진하곤 했다. 토굴에서는 물론이고 여행을 함께 하면 그곳에서도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스님은 그렇게 방석 때가 묻은 선방 수좌이긴 하지만 우리 포교당에 오면 절의 일도 곧잘 도와준다. 어떤 스님들은 산철에는 편안한 휴식을 위해 도반스님 절을 찾는다고 하지만, 영각스님은 우리 절 일을 마치 자기 절 일처럼, 은사스님 곁에서 시봉하듯 한다. 내가 새벽 예불을 위해 일어나면 벌써 법당에서 준비를 마치고 앉아 있고, 행사 때가 되면 서슴없이 바라지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가끔 법문이라도 청하면 그건 주지스님 몫이라며 목탁부터 잡는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예전에 절 옆에 대순진리교에서 운영하는 교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미륵부처님 이야기를 하며 불교를 사칭해서 집집마다 돈을 걷고 다니며, 정혜사에서 나왔다며 우리 절 이름을 팔고 다닌단다. 이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던 영각스님은 당장 가서 혼을 내줘야 한다며 나보다 더 흥분했다. 그러면 내가 가까스로 진정 시키곤 했는데 그때는 누가 주지이고 누가 객스님 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절 계단을 내려가던 스님이 흥분해서 뛰어들어 왔다. 대순진리교 교당에서 정혜사 간판을 붙였단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해 보았더니, 간판을 실제로 단 것이 아니라 계단 유리창에 우리 절 간판이 비추어서 마치 대순진리교당 쪽으로 간판이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였던 것이다. 스님과 나는 그냥 웃고 넘어갔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스님은 며칠 동안을 노심초사하며 우리 절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고.
영각스님은 이렇게 도반스님의 포교당을 자기 절처럼 생각하며 아껴준다.
흔히 불교를 겉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절을 외호(外護)하고 호법(護法)하는 것은 주지의 몫이고 선방에서 공부하고 정진하는 스님들은 선승(禪僧)이라며 따로 따로 생각한다. 그래서 선원에서의 참선은 중요하며 매우 불교(?)답고, 포교하는 사람들은 덜 중요하게 생각하며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이판(理判)이니 사판(事判)이니 하면서 제법 아는 척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원래 이판이란 의미에는 참선, 경전공부, 포교 등의 불교 교리 전반의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반면에 사판은 절의 산림(山林)을 맡아 하는 분들을 지칭하던 말인데, ‘살림살이를 잘한다’고 할 때 ‘살림’은 바로 이 ‘산림’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참선하는 스님들과 포교하는 스님들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구별은 조선시대에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내세우며 스님을 천시하는 풍조에서 나온 말이다.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그 시대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의 신분이 되므로 끝장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인데, 그런 분별을 천박하게 지금 이 시대에 적용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불자다운 사고가 아니다. 예전의 스님들은 이판과 사판을 겸했다. 아니 그런 구별조차 없었다고 해야 맞는다. 출가 수행자에게 공부와 포교는 따로 있을 수 없다. 스님들은 누구나 출가하면 일정기간 공부하며 수행한다. 그 기간이 지나면 각자의 처지에 맞게 수행처(修行處)도 정하고 하고 싶은 공부, 해야 할 일들을 한다. 그래서 이판과 사판은 둘이 아니다. 무엇을 하건 수행자답고 불교인다우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바른 이치를 터득하고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 ‘이판사판’으로 덤벼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영각스님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 주인이 되어 열심히 수행하는 스님일 뿐이다. 여기에 이판과 사판의 구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스님과 나는 만나면 공부의 진척(進陟)을 묻기도 하고 세상 일을 함께 이야기하며 많은 교감을 나눈다. 그때마다 스님은 항상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미안해 한다. 덕분에 맘 편히 공부할 수 있다면서…
그런데 나는 스님에게 항상 미안하다. 한 철 정진이 끝나고 우리 절에 오시면 좀 편히 쉬고 가면 좋으련만 대개는 일만 하다가 가는 스님을 생각하니 그렇다. 그리고 스님이 결제에 들어가 정진할 때에도 그 흔한 대중공양(大衆供養) 한번 변변히 낸 적이 없으니 또 그렇다. 절 형편이 나아지면 꼭 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은 돈 벌고 나면 좋은 일 해야겠다는 어리석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게 느껴질 뿐이다.
요사이 영각스님은 해제 철에도 보기 어렵다. 결제와 해제를 가리지 않고 공부에 정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울 때마다 옆에서 격려해주고 또 가끔씩 보여주는 그 순수함과 천진함, 공부에의 열정을 지닌 스님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서울 정혜사 주지
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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