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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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는 법에서 태어난다
인종·종교·성별에 따른 차별 부정
불성의미 극대화·평등원리 등장

<별역잡아함경>제12: 638경에는 “그대들은 마땅히 알라. 나는 이제 열반에 들어가는 최후의 몸을 받았으며, 위없는 훌륭한 의사로서 독의 화살을 뽑아버렸노라. 이제 그대들은 모두 나의 아들이다. 그대들은 모두 나의 마음과 입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법으로 화생했으므로 그대들은 바로 내 법의 아들이다”란 구절이 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죽림정사에서 오백명의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시면서 하신 설법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유신론자들의 설교를 듣는 것과 같은 내용이지만 이 가르침의 이면에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당시 인도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4성계급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다. 4성계급이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를 말하며, 이들은 신분에 따라 태어나는 방법도 다르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바라문은 범천의 입으로, 크샤트리아는 오른쪽 옆구리로, 바이샤는 우리들이 태어났듯이, 수드라는 엄지발톱 사이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범천의 입으로 태어나는 브라만이 가장 존귀한 존재로 대우받았다.
부처님은 선천적인 인간의 차별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그가 어떠한 행위를 하는가에 따라 빈부귀천이 갈라진다고 본다. 모든 것은 자기가 만들고 자신이 책임지는 철저한 인과율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천적으로 정해지는 계급제도란 사회적 횡포이며, 계급 모순과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라 강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의 교정을 위해 노력한다. 인종, 종교, 성별, 지역에 따라 인간을 차별해선 안 되는 것이라 본다.
대승불교의 전개는 초기불교의 이상과 같은 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구현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대승불교운동가들은 불성을 발견하게 된다. 부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불성(佛性)은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평등의 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 중에서 초기불교의 정신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 <법화경>이다. 금년도 각 종단 대표자들의 신년 법어 중에도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나며, 부처님의 옷으로 덮어준다”(從佛口生 佛衣覆) 내용이 있다. 이것은 <아함경>에 나타난 부처님의 사상을 재현한 것이다. 한편으론 <법화경>의 비유품과 법사품에 나오는 구절을 응용한 것이기도 하다. 비유품에는 “오늘 비로소 이 부처님의 아들들은 부처님의 입으로 태어났으며, 법에서 변화하여 태어났으며, 부처님의 법의 유산을 얻었음을 알았습니다”하는 구절이 있다. 법사품에선 여래의 옷을 탐욕과 성내는 마음을 떨쳐버린 화평한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상의 문구에 대해 천태종을 창시한 천태지의 스님(대정장34, 64중)은 세 가지 기쁨과 세 가지 성취로 이해한다. 신구의 3업이 청정한 상태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규기 스님(상동, 736중)은 <법화현찬>에서 부처님의 아들임을 안다는 것은 바로 도의 성취를 의미한다고 풀이하고,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성스러운 지혜를 얻는다는 의미로 본다. 부처님의 법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법신의 길을 따라서 상사법을 성립하는 것이며, 법신의 길이란 제 보살들이 지니고 있는 복덕과 지혜이고, 법의 유산을 얻는다는 것은 번뇌가 없는 법의 재물과 보배 그리고 상사법을 수용하는 것이라 본다.
길장 스님(상동, 514상)은 <법화의소>에서 <대지도론>을 인용하여 “바라문은 범천의 입에서 태어나므로 4성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제 풍속에 따라서 부처님의 입으로 태어난다고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정한 범천이므로 부처님의 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가장 훌륭한 일임을 나타낸다. 법으로 화생한다는 것 역시 비유와 찬탄을 빌려온 것이며, 부처님의 법의 유산을 얻는다는 것 역시 간단한 찬탄”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상에서 천태 스님은 매우 종교적인 해석을 보이고 있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일체의 행위와 역사를 엮어간다는 점에서 이들을 정화시킬 수 있다면 세상은 저절로 정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세 가지 성취로 해석을 하고 있다. 반면 규기 스님은 철학적이면서도 중국적이다. 스님 자신이 유식불교학의 대가인 만큼 <법화경>을 지혜의 체득으로 해석을 하는 한편, 중국인 특유의 절대 가치인 도의 완성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상의 두 스님에 비하면 길장 스님은 찬탄과 인도적인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러나 중국을 대표하는 스님들의 해석에서는 사회통합과 계급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던 부처님의 생생한 고뇌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 점은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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