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망국恨·고려 건국기운 서린
미륵의 성지
새해의 꼭두에 서서 미륵의 처소를 묻는다. 희망과 환희의 순례자, 미륵은 어디에 있는가. 어질고 가난한 백성들이 오천년 핍박을 받으며 살던 나라. 또 다시 새로운 정토 건설을 약속하며, 서민 출신의 대통령이 미륵의 화신인양 화려하게 등장했는데, 사바세계의 야단법석을 둥글고 환한 미소로 굽어보는 미륵의 당체는 어느 곳에발길을 모두고 지켜보시는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어찌 눈밭을 갈아엎듯 쉬운 일이겠는가. 인연은 56억7천만년의 수기를 받아야 하고, 도솔천은 몇겁의 윤회를 거쳐서 비로소 당도하는 곳이기에 촉수 흐린 중생의 시력으로 참미륵의 진위를 묻자니 흰 눈발 얼비치는 시린 세상 그대로가 용화장 세계로 비친다.
월악산은 달빛의 때 아니라도 꿈결처럼 부드럽고 아늑한 곳이다. 흰눈발로 장엄한 영봉 아래 점점히 늘어선 골짜기들은 미륵의 처소로써 마땅하다. 눈꽃을 피운 낙락장송마다 차가운 햇살이 어지러움을 더한다. 월악산의 상서로운 서기가 한 곳에 스미는 계립재 미륵리. 이름조차 그러하여 여기 일찍부터 미륵으로 나툰 이들은 돌로 몸을 만들었어도 그 미소는 천년을 시들지 않은 채 양(羊)처럼 순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계미년은 양의 해이다. 큰(大) 양(羊)을 가리켜 미(美)라 하였으니 미륵도 월악산 미륵쯤 되어야 대불의 반열에 들 수 있으리라.
중원 땅 충주와 수안보를 거쳐 하늘재 문턱에 닿자 대낮인데도 산길은 벌써 해그림자가 깔린다. 몇 걸음 앞서 진눈깨비가 스치고 갔는지 경사진 노면이 축축히 젖었다. 진눈깨비는 눈송이가 피지도 못하고 시든채 내리는 눈발이다. 피지 않고 저무는 것이 어디 저 눈발뿐이랴만 미륵도, 미륵을 고대하며 새재, 조령, 까마귀골을 넘나들던 이 땅의 지순한 백성들도 결국은 진눈깨비처럼 분분한 영혼으로 흩어져 갔을 것이다.
월악산 미륵대원지는 사적 제 317호로 신라인의 후손들이 창건한 고려의 절이다. 신라가 천년 사직의 종언을 고한 후, 마의태자가 태자비인 덕주공주와 더불어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미륵대불을 조성했다는 일설이 있다. 그와 더불어 또한 설득력을 얻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새 세상을 열기 위해 이 곳 월악산 자락에서도 소리없이 불사를 일으켰다는 전설이다. 어쨌거나 불사를 기획한 이들도, 불사의 현장에 노동의 수고를 공양한 이들도 모두가 이 땅의 백성들이니, 서라벌 사람이든 패서 사람이든 미륵을 기다린 이들이야말로 미륵의 식솔들인 것이다. 말없는 것이 어찌 푸른 산빛을 깨치고 간 그리운 님들의 흔적뿐이랴. 기록도 전거(典據)도 분명치 않은채, 정작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미륵대불은 멀리 덕주산성 밖 덕주사의 마애불만을 마주보며 조국 신라의 운명도 자신들의 미래도 부처님께 맡긴채 계립재를 넘던 아픈 추억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 이사금 3년조에 계립령로를 열였다’는 구절이 보인다. 조선반도의 동쪽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 신라는 험준한 태백산 등줄기에 계립령로를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한수 이북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 수 있었고, 삼국통일의 디딤돌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중원 일대는 조선반도의 중심을 서로 차지하려는 제국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계립령로는 그 중요한 군사도로가 되었던 것이다. 미륵대원지에서 마의태자의 체취와 더불어 고구려 온달 장군의 흔적이 짙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절 터 오른편의 보주탑이라 불리는 거북바위 위의 지름 1m정도의 둥근 바위는 지금도 ‘온달장군 공깃돌’이라 불리고 있다.
중원 이 일대가 삼국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은 도처에 남아있는 국보급 유물들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수안보로 향하는 길목에만도 중앙탑으로 널리 알려진 탑평리 7층석탑(국보 6호)이 있고, 중앙탑에서 서북 10리쯤 용전리 입석마을에는 삼거리 비각 안에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가 있다. 중원탑은 현존하는 유일한 통일신라의 7층석탑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중원의 진정한 주인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세운 상징적 표식이다. 용전리 고구려비 역시 남한에 현존하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자연석에 비문을 새긴 수법이나 생김새가 광개토대왕비를 빼닮았다. 그렇게 볼 때 미륵대원지는 신라와 고구려의 숨결이 한데 어울리고 신라 망국의 한과 고려 건국의 새 기운이 함께 빚어낸 참으로 도타운 미륵의 성지인 것이다.
미륵리사지는 석굴사원터로, 면적은 80,454㎡이고 평균 해발 378m 이상 되는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폐사지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전실과 주실이 드물게 북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실에는 높이 10,6m가 되는 거대한 미륵불 입상(보물 96호)이 멀리 송계계곡 밖 충주호를 굽어보며 북녘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그 미륵불상과 일직선상으로 다시 석등과, 5층석탑(보물 95호)이 단탑씩 가람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미륵대불은 왜 북천을 향하여 서 있는가. 그것은 대륙을 넘보고자 했던 고려 왕조의 넘치는 기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미륵대불을 에워싼 주실은 기본적으로 석굴암 석축 형태를 모방하여 쌓아 올린 것이나 석굴암 돔형 지붕과는 달리 석축 위에 목조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지금은 주초만이 남아 있다. 가로 9.8m 세로 10.75m의 방형으로 무사석으로 쌓아올린 석축은 이제 세월의 중량을 감당할 수 없는지 한켠은 중간이 갈라져 겨울잠도 마다한 채 산다람쥐 들락거리는 요새가 되었다. 대불 앞 향촉대는 슬그머니 근처에 세들은 세계사라는 조립식 암자에서 임대료로 대신하는지 조석으로 쌓아 올린 촛농이 탑을 이루고 있다.
미륵대원지는 1977년과 79년 두차레에 걸쳐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져 그 윤곽이 다소 드러나게 되었고,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바 있으나 확실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고 ‘미륵대원(彌勒大院)’이라는 기왓장이 발견되어 삼국유사의 미륵대원기록과 함께 고려 초기의 사찰로 추정될 뿐이다.
미륵대원지의 유물들은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하여 처음 놓인 그 자리에 원형 그대로 조형한 것이 찾는 이의 마음자리를 한없이 편안케 해준다. 거대한 화강암 5개를 연결하여 얼굴을 만들고 몸을 다듬은 주존불 미륵부처님은 초승달 같은 긴 눈썹, 가늘게 뜬 두 눈과 두툽한 입술, 발 아래까지 늘인 통견의 법의는 얼핏 졸렬해 보이기는 하나 충청인들의 인심을 엿보는 듯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그 뿐이랴, 높이 6m의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5층탑 역시 그 받침돌과 1층 기단이 그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그대로 다듬은 것이다. 약수터 옆의 거북돌도 마찬가지. 무게를 혜량할 수 없을 정도의 거구인 돌거북은 검은 자연석을 통째로 다듬은 것인데, 등허리에 매달린 2마리의 새끼거북과 골짜기를 벗어나고자 두발을 내젖는 형상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사지의 주변 일대는 국립공원 관광지로 정비된 탓인지 비교적 깔끔히 정돈되어 있다. 도처에 눈에 띄는 큼직한 자연석들은 그 옛날 눈밝은 이들이 미륵의 가람을 조성할때 선택되지는 못했지만 아직도 그 냥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 무슨 미련이 있는 듯 하다.
진눈깨비에 옷소매를 다 적신 미륵대불은 독감(毒感)만을 얻어 산문을 떠나는 순례자의 어깨가 안쓰러운지 내내 환한 눈빛으로 배웅하고 있다. 이제 계절이 더욱 깊어지면 미륵리 마을은 빼꼼히 연 하늘문조차도 걸어 잠근채 캄캄한 적막속에서 춘삼월을 잉태할 것이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다음은 청주 흥덕사지 편
미륵대원지 가는길
영동고속도로로는 이천IC에서 내려 장호원 →주덕 →충주를 거쳐 동남쪽 국도를 따라 20㎞ 정도 달리면 수안보 온천이 나온다. 수안보 온천 입구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지방도로가 있는데, 그 길로 8㎞ 정도를 가면 월악산 국립공원 입구인 계립령로가 나온다.
이 계립령로의 초입인 지릅재를 넘으면 작은 동네가 나오는데 이 마을이 미륵대원지가 소재한 상모면 미륵리이다. 마을 전체가 미륵대원지 휴양지로 되어 있어 비교적 넓은 주차장과 민박집들이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김천IC에서 내려 상주→ 문경 →수안보에 이르러 월악산 방향의 지방도로로 찾아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