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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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예(4)
불교가 꽃피운 황금문화

우리는 5, 6세기의 신라를 황금시대라 부른다. 동산만한 무덤 속에서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황금문화는 삼국통일과 더불어 무덤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금제품을 비롯하여 만 여종에 이르는 부장품이 쏟아져 나온 5, 6세기의 돌무지덧널무덤이 통일신라때 돌방무덤으로 바뀌면서 부장품도 고작 십여 종에 불과하고 그 찬란한 금붙이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불교이다. 이전처럼 왕이 죽어서 반드시 왕의 권세를 누린다는 보장이 없고 미천한 백성도 깨달음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것이 바로 불교의 내세관이다. 더 이상 무덤을 치장하는 일이 의미가 없어졌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기는 오히려 화려한 금으로 번쩍였다. 화장을 비롯하여 간소한 장례 의식을 선도한 것은 불교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불교계에서는 부처님의 열반을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왕과 귀족의 권위를 상징하던 황금문화가 통일이 되면서 부처님을 장엄하는 장식으로 바뀐 것이다.
1959년 4월 송림사5층전탑(보물 189호)을 해체하였다. 경북 칠곡에 위치한 이 탑은 경주에서 시작된 전탑의 유행이 칠곡을 거쳐 안동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이 탑의 2층 지붕에서 금동으로 만든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기는 녹색유리잔 안에 녹색 유리병을 넣고 그 바깥은 금동으로 전각을 꾸몄다. 금동으로 만든 제품에 유리잔이 함께 나타나는 것을 보면 5, 6세기 황금시대의 유물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한다. 금동판을 오려 붙여 건물을 만들고 귀걸이 식의 장식으로 커튼을 단 점은 영락없이 금관의 기법이고, 표면에 고리모양의 장식을 붙인 유리잔은 페르시아의 커트글라스(cut glass)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리장치는 이 전탑의 연대처럼 분명 8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고신라 때 왕이나 귀족의 무덤의 금관이나 금동관을 장식했던 방식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장치를 장엄했던 것이다. 고신라를 풍미했던 황금문화가 통일이 되면서 사라졌는가 싶더니만 놀랍게도 불교계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송림사탑 사리장치의 전각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 그것은 최근 주경미 박사의 연구에 의하여 장례에 쓰였던 상여 모양임이 밝혀졌다. 돈황 막고굴 당나라 벽화에 이 사리기와 유사한 모양의 상여가 표현된 것이다. 아마 통일신라시대에도 당나라 식의 상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사리를 당시 귀인의 주검을 모신 상여에 안치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사리기는 매우 국제적인 이미지로 결합되어 있다. 황금시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고신라의 금동기법에 당나라 혹은 통일신라시대의 상여,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사리그릇으로 표현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사리기는 감은사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사리장치에는 당나라 풍이 역력하다. 하지만 송림사탑 사리장치는 당나라 풍의 사리장치가 황금시대의 전통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사리장치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새겨볼 수 있는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교수

200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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