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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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각스님 (上)
‘카푸치노 대접’ 애쓰던 모습 선해
고운사 3년결사 이후 매년 안거

해가 바뀌었다.
절 집에서는 묵은 해니 새해니 분별(分別)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나 같이 덜 익은 중생들에게 새해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올해도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몇 가지 계획을 새로 세우고 추진하기로 했다. 또 새해에 하는 일 중에 빼 놓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평소에 연락이 뜸했거나 소홀했던 지인(知人)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매년 유난히 생각이 나는 도반(道伴)들이 있다.
출가 수행자에게 도반은 평생의 친구이자 좋은 의지처이다. 도반은 ‘도를 닦는 동반자’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말이지만 의미를 새길수록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공부의 반은 좋은 도반들로 이룬다’는 말도 있다. 바깥에 있을때 누군가가 평생동안 참다운 친구 3명만 사귀어도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는 승(僧) 속(俗)을 가리지 않고 중요한 가 보다.
출가자는 말 그대로 자신이 살던 집을 버리고 나온 사람이다. 집이 상징하는 소유를 버린,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구름같이 바람같이 떠돌아 다닌다. 그들이 항상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삶은 고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외로운 수행자들은 서로 만나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즉시 도반이 된다. 나이 차이나 조건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하룻밤 정도 함께 앉아 녹차(綠茶)를 우리고,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누면 금방 오래된 도반이 된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도 좋은 도반이 되는데 오랫동안 함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의지하는 도반이 많이 있다면 그는행복한 수행자이다.
내게는 세속의 인연에서 만나 출가자의 길을 함께 가는 비교적 오래된(?) 도반이 한 분 있다.
바로 영각 스님이다. 스님과 나는 대학 동기 동창이다. 스님은 나보다 몇 년 앞서 출가한 선배지만 난 언제나 동기로 편하게 생각하며 지내왔다. 스님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줄곧 선방 수좌로서 수행하며 정진했다. 고운사에서의 3년 결사(結社)를 시작으로 매년 빠짐없이 안거(安居)에 들어가고 해제 때에도 가끔씩 산철 결제에 들어가 정진하곤 했다. 이렇게 우리 교단에는 시종 초연하게 자기 길을 가는 수행자가 많다. 이 분들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영각 스님과 나는 해제 철이면 곧잘 함께 지냈다. 대개 선방 수좌들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토굴 생활은 피하는 편이지만 우리는 죽이 잘 맞아서인지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없이 잘 지냈다. 또 우리 절 신도들은 영각스님을 무척 좋아한다. 스님은 천진함과 순수함으로 여러 스님들 가운데 단연 인기가 높다.
몇년 전에 스님의 일면을 느낄 수 있는 재밌는 일이 있었다. 영각 스님과 나는 차(茶)라면 종류에 상관없이 좋아한다. 특히 커피도 잘 마셨는데, 하루는 스님이 카푸치노를 만들어 주겠단다. 그 때만 해도 절에서나 가정에서는 지금처럼 여러 종류의 커피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인스턴트 커피나 원두커피 정도는 있었지만, 카푸치노 같은 것은 전문점에 가서나 먹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몇몇 신도들의 기대와 의심(?)속에 스님은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인스턴트 커피 약간에다가 프림과 물을 아주 조금만 넣고는 티 스푼으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젓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엇인가 싶어 쳐다보고 있는데 영각 스님은 이렇게 계속 저으면 거품이 생긴다고 하면서 선방에서는 가끔 그렇게 카푸치노(?)를 타서 드셨단다. 순간 우리는 모두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너무 어이가 없어 웃고 있었는데, 스님은 너무도 열심히, 진지하게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저어서 거품이 난다고 보통 커피가 카푸치노가 될 리 없지만, 그 날의 그 커피는 카푸치노보다 훨씬 맛있고 특별했음은 분명했다.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우리 절 대중들에게 회자(膾炙) 되었지만, 스님의 그 천진함과 순수함만큼은 그들 가슴속에 깊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가끔 도(道)에 대해 생각해 본다. 도가 높고 법력(法力)이 수승하여 수행을 잘 하는 스님은 어떤 분일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마음 씀씀이와 행동 하나 하나가 맑은 거울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큰스님들은 모두가 천진하고 순수하셨단다. 어린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한다. 큰스님들이 아이들과 놀아 주시는 모습을 옆에서 뵈면 누가 어른이고 아이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니까…
안거가 끝나고 뵐 때마다 순수해지는 영각 스님에게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도 하며, 공부 잘하는, 공부가 잘 된 수행자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계속) ■서울 정혜사 주지
200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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