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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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주장자에 일체를 맡기면 내 마음·가정·조상 모두가 편안
여여한 자성불에 코드를 꽂으세요



진실하게 믿으려면…

마음공부를 하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 생각하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근본에 일임하는 생활이 되지 못한 채, 누가 보고 누가 듣고 누가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이렇듯 한해를 지내고 나니 허탈한 마음이 앞섭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또 한 해가 시작됩니다. 진정코 이 생이 다하기 전에 저의 근본, 반야줄을 놓치지 않고 진실하게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침 바랍니다.



부처님 법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이 찰나찰나 나투는 생활이지만 우리가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시간도 만들어 놓고, 공간도 만들어 놓고, 날짜도 만들어 놓고 해우년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해서는 한층 더 분발해서 자유스런 계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도 느끼다시피 물에 가면 싱그럽고 참 좋죠? 이 세상 만물이 다 내 스승이 아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물은 날더러 말없이 살라고 하고 꽃도 나같이 살라고 하는 겁니다. 모진 풀뿌리를 봤을 때도 그 풀뿌리가 나를 보고서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이에요.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나같이 살라 하니 내 스승 아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하게 믿되 믿는 것을 바깥으로 믿지 말고 안으로 진실하게 믿고 맡겨 놓는 작업을 할 때에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까 그 속에다 맡겨놓는 작업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진실하게 구하는 법도 나오고 진실하게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항상 주인공을 찾다가도 용도에 따라서 어떠한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바깥으로 끄달리곤 합니다. 안에다 물을 줘야 바깥의 나무들이 잘 자랄 텐데 말로는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고 그렇게 알아들었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이 진실해야만이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고, 모든 걸 둘로 보지 않고 내 탓으로 돌리고 나한테서만이 이끌어줌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모든 해결을 그 속에서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나를 깨닫게 하는 것도 그 속에서만이 깨달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진실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가짜입니다.
곧 죽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게 안으로 넣고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한 철 나와서 부딪침이 없다면 또 다시 어디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한 철 살 때에 부지런히 해서 깨달아야만 요 다음 생에, 아니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자유스럽게 보고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자유스럽게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로소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인 것입니다.



급할 때 관하는 방법?

현대불교를 통해서 마음공부를 시작한 불자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나가다 보니 금전적인 문제나 사람들한테 어려움을 당할 때나 그런 것은 어느 정도 마음으로 해결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건강의 문제라든가 죽음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는 한마음에 어떻게 의지해서 수행해야 되는지, 어떻게 자기 마음을 관(觀)해야 되는지 그게 의심스럽습니다.



사람이 나 하나 죽으면 모든 게 없는 거니까 간단하죠. 생각해 보십시오. 나 하나가 죽는다면 아예 그냥 간단하지 않습니까? 뭐 여러 말 거기 붙을 게 없죠. 그래서 첫 번째도 죽고 두 번째도 죽고, 세 번째도 죽으라고 그런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를 하나 할까요? 지금 당장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고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없이 어린 다섯 남매를 데리고 사글세에 들어 있었어요. 우리 절에는 두 번 왔습니다. 두 번째 와서는 “어떻게 해야 삽니까?” 하고선 울어요. “우리 같은 형편에 스님이 그렇게 가르치시는 그 뜻이 저한테도 적용이 되는지요.” 이러고는 묻는 겁니다. 그러고는 “지금 당장 내쫓기게 생겨서 거리로 나앉게 됐습니다. 내일 모레 세간을 다 바깥으로 내놓으라고 그러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마음공부를 적응해서 배우며, 지금 급하게 난관에 처해 있는데 그 공부를 해야만 되겠습니까? 마음공부가 거기에 해당합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해당하고 말고!” 그랬습니다. “너 하나만 죽는다면 그까짓 것 뭐, 시간이고 애고 어른이고, 다 너라는 것 하나만 죽는다면 된다.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놓고, ‘주인공이 죽이든지 살리든지, 볶아 먹든지 구워 먹든지 너 알아서 해라.’ 그러고 아예 그냥 맡겨버리고,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하고는 그냥 맡겨버리고는 거리로 나앉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런 걸 아예 포기하고 다 놔라.” 이랬습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지만 그렇게 못하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정말 벗어나려면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왜? 우리가 지금 죽으러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한 번 죽을 겁니다. 그런데 죽는 게 뭐가 두렵습니까? 길가로 나앉으면 어떻습니까, 하늘이라는 지붕이 있는데. 안 그래요? 그렇게 다 내던질 수 있는 마음이 되면 오히려 솟아날 구멍이 생기게 되는데 살려고 버둥대는 ‘나’라는 의식들만 잔뜩 쥐고 꼼짝도 못하고 있다면 마음은 마음대로 괴롭고 형편은 형편대로 곤두박질을 칠 뿐인 것입니다. 다 버리면 다 얻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왕 죽으려고 나왔으니 나는 없소 하는 마음으로 한번 크게 쉬어본다면 오히려 삶의 다른 면을 맛보게 되어 한 걸음을 참답게 내디디는 결과가 있게 될 겁니다.


계속 살아야 하는 까닭은?

어리석은 질문에도 항상 친절히 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스님은 항상 세상과 자신을 둘 아니게 보라고 하시지만 세상과 둘 아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저를 욕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저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서로 뺏고 빼앗기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온통 고통뿐인 거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많은 이의 희생이 있어서겠죠. 결국 제가 누군가에게 잡혀 먹힌다 해도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잘 생각해 보면 모두가 내 아님이 없어서 싸울 필요가 없겠지마는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수억 광년을 거치면서 진화되고 형성되고 또 진화되고 형성되고 해서 고등동물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미생물에서부터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이렇게 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해 나왔겠죠. 지금도 사람까지 올라와서도 내 부모 아니고는 남의 부모라고 생각을 하는데, 벌레로부터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형제가 있었으니 지금까지 우리가 진화돼서 형성돼 올라온 자체를 볼 때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모두가 그러한 것이기에 부처님께서는 적대적인 마음을 갖지 말고 항상 한마음으로 살아야 된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 살아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내 부모조차도 싫다고 하는 세대 아닙니까? 내 부모를 내가 싫다고 할 때 내 자식은 나를 또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쯤 생각해 보셨습니까?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이 즉 부처님 법입니다. 우리의 생활 없이 부처님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다 부처님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고등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 살아나가는 데 정신계 50% 물질계 50%를 겸해서 정맥 동맥이 같이 돌아가듯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사대 성인들은 말씀하시기를, 예를 들어서 방편으로 말한다면 ‘못났든 잘났든 너부터 발견하라, 너부터 알아라. 참 너부터 믿어라. 자동차가 너라고 하지말고 자동차 속의 운전수가 너다. 너를 발견한다면 운전수와 자동차가 콤비가 돼서 항상 같이 할 수 있어서 살기가 유하니라.’ 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사십니까? 50%의 물질로서만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막히고 걸리고… 다시는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그런 환경이 돼 버리고 말았죠. 극한 일이 터졌을 때, 앞에 닥쳤을 때 어떻게 대치를 하시렵니까? 여러분이 항상 자동차를 자기라고 해요. 나무로 치면 뿌리를 자기라고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싹을 자기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다라고 그래요. 즉 말하자면 싹은 뿌리에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려보내야만이 싹이 푸르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도 피고 열매도 무르익어서 남을 주기도 하고 내가 먹기도 하고, 세세생생에 끊임없이 아마 베풀어질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마음이 넉넉해야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작으면 작은 대로 작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근본은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만물하고도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자기와 자기가, 즉 말하자면 참자기는 부(父)라고 하고 이 몸은 자(子)라고 합니다. 부와 자가 통하면 어느 일체 만물하고도 통합니다. 이 모든 삶을 극복하는 문제도 여러 가지 가지겠지만 이 도리를 알면, 그리고 모르더라도 내 주인공 내 주장자를 쥐고 나가면 그렇게 내 마음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가정이 편안하고 내 식구가 편안하고, 위로는 조상 아래로는 자녀들이 모두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라는 것은 실천이 아니면 도가 아닙니다. 이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다 자격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고 패기가 있고, 능력이 있는 자체가 바로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격과 능력은 아주 문을 닫아버리고 남의 거를 바라고 남의 이름을 찾는가 하면 남의 형상을 찾고 믿으면서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들 있지 않습니까?
상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거를 믿어야 되겠습니까? 부처가 이 자리에 있어도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없어요. 똑바로 아셔야 됩니다. 내가 죽을 때에 대신 죽어줄 수 없고 대신 아파줄 수 없고, 대신 똥눠줄 수 없고 대신 먹어줄 수 없고, 대신 잠자줄 수 없고 대신 깨달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못났든 잘났든 여러분이 스스로가 귀중합니다. 나부터 귀중한 걸 알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면, 아마 자기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벗어날 것입니다. 그 도리를 완전히 터득하신다면 여러분은 다 남을 위해서 이끌어줄 수 있는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내 마음을 찾으려면…

예전 선지식들께서는 일체가 내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뭐꼬” 화두를 방편으로 참구하도록 가르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듯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있다면 어떻게 수행을 해나가야 내 마음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요?



마음에 있다면 마음에 있는 것일 뿐인데 그걸 어떻게 하라구요. 그 마음이라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빛깔도 없으니까 공이라고 했으니 그게 바로 마음의 주인인 거예요.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자신이다, 주인이다, 주인공이다, 뭐 이런 것도 다 이름일 뿐이에요. 스스로 자기가 느낌으로써 알고 감응이 되고 그러면서 내가 안으로 굴리게 되고 자꾸 발견하게 되고 계발하게 되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일상 생활을 누가 하는가 지켜보세요. 일거일동을 누가 합니까. 모든 것은 자기가 하고 있죠. 그런데 자신이 공했기 때문에 하는 것마저도 다 공해 버렸죠. 우리가 그대로 꿈이면서도 실상 아닙니까? 공했으면서도 그대로 하고 있다 이겁니다. 여여함 그대로 진리예요. 그래서 자기 마음의 주인을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마음이 여기까지 끌고 온 거죠. 그런데 지금만 끌고 다니는 게 아니죠. 억겁전서부터 끌고 온 거예요. 그러니 끌고 온 것을 봐서 앞으로도 끌고 갈 거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의 주인으로부터 알아야 합니다. 꼭 한 놈이 숨어 있다고 보는데, 고 한 놈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항상 윤회에 끄달리게 돼요. 우리 공부하는 것이 자유인이 되고자 해서 이렇게 공부하는 거지, 만날 끄달리면서 살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지 않아요? 끄달리는 거뿐입니까? 끄달리는 종류도 다 다르죠. 탈도 인간의 탈을 썼느냐 아니면 요 다음에는 소의 탈을 쓰느냐... 다른 탈도 쓸 수 있고, 또 다른 탈을 쓴다고 하는 것이 사람의 탈을 또 쓸 수도 있는 거고, 마음가짐 가짐에 따라서 그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업이다, 고다 그러는데 모두 여러분이 짓고 여러분이 받는 것뿐이지 누가 갖다줬고 뺏어 가는 게 아닙니다. 어느 놈이 하는가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어느 놈이 이렇게 하고 있는가 하고 참구하라는 겁니다.
고놈이 하거든요? 안 그래요? 공했다는데 고놈이 하는 걸 가만히 생각해 봐요. 아, 요것도 했다가 조것도 했다가 돌아간단 말이에요, 고놈이. 그러니까 아, 요놈 봐라. 이거 할 때 나라고 할 수도 없고 저거할 때 나라고 할 수도 없구나. 그러니까 요놈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아, 고놈이 요것도 하고 저것도 고놈이, 요렇게 갖가지로 여여하게 해나가니, 그래서 공했다는 거로구나. 요놈이 공했구나, 이 공한 놈이 바로 보이지도 않는 거로구나. 요놈이 어저께는 방귀를 풍하고 뀌더니 요놈이 오늘은 뽕하고 뀌었구나 그러고 찾으면 돼요.
그러니까 쉽게 배워요, 쉽게. 우리 쉽게 하자고요. 자기 근본이, 바로 지금 생긴 자체가 바로 공이자 주인입니다. 그러니 한 번 움죽거리는 거, 말하는 거, 생각 내기 이전에 벌써 움죽거리고 있는 이것이 다 그대로, 그대로다 이거예요. 놔 버린다는 생각조차도 놔 버려라 이거예요, 거기에. 본래는 주인공이란 이름조차도 방편입니다. 허나 이것을 알기 위해서, 발견하기 위해서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뒀고 시삼마라는 화두를 선지식들이 가졌고 그랬는데, 이뭐꼬나 시삼마나 바깥으로 굴릴 필요가 없이 직행으로 들어가라 이겁니다.
주인이며 공이다 이겁니다. 공이면서도 색이니 부착돼 있다, 형성돼 있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형성시켰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다녀요. 이거 부정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여러분이 생활하시면서 단 반 시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일할 때도 좋고 설거지 할 때도 좋고, 차 타고 다니면서도 좋고 빨래를 하면서도 좋고, ‘주인공이 모든 걸 일체 다 하는 거지.’ 하고 관하세요. 앞에 급한 게 부딪치더라도 주인공에다가 다 일임시켜 버려요. 놔 버려요. 그러고 믿어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데서 다 해 가지고 벌써 보이는 데로 나와요. 이 세상에 집을 지으려고 해도 속으로 먼저 이렇게 해야겠다는 설계가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설계가 나오잖아요. 그러니 정말 나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한다면 우선 나를 형성시킨 주체가 내면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그대로 곧바로 잡고 들어가는 관법을 꼭 익혀서 자신이 존재하는 뜻을 다 깨우치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잘못 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비로우신 가르침을 청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부적을 써 주는 분을 만나 그분의 지시대로 큰돈을 들여 부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업장이 너무 두터워 자력으로 닦아내기는 어려우니 이 부적을 지니면 업장 소멸과 액운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하시며 그걸 지니고 열심히 기도를 하라 하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아무것도 모를 때라 그저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고 스님의 법문을 인터넷을 통하여 뵙게 되니 제가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스님! 그것도 하나의 길이 맞는지요? 아니면, 옳다 그르다를 분별하려는 이 생각마저 놓아야 하는 것인지요? 높으신 가르침을 갈구합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삼천대천세계 우주 법계를 다 싸고도는 대표인으로서의 인간이 없다면 대표인이 못됩니다.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 그 법계가 있는 것이지 여러분이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진리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여러분의 근본적인 그 마음의 주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단란하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상응하면서 정원을 꾸며놓고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전체적으로 다 지구덩어리 하나가 바로 당신네들 집입니다, 안식처고. 그런데 단란하게 살고 여여하게 살지 못한 채, 남한테 이런 소리 듣고 바람이 부는 대로 쏠린다면 갈대와 같은 거지 어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깨달으면 이 지구덩어리뿐만 아니라 우주 천체 법계가 다 내 한마음에 들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여러분이 사람이 돼서 나오기도 어렵거늘, 사람이 돼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부적을 써서 붙인다, 부적을 써서 재수가 있게 한다, 아픈 것을 내보내기 위해서 부적을 붙인다, 관재구설이 없게 하기 위해서 부적을 붙인다 이러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자기 마음에 일체 만법이 다 있거늘 어찌 그런 행위를 하겠습니까. 모르고들 그렇게 하겠지마는 그 모르고 하는 것을 알게끔 자기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모르고 그런 행을 하는 것을 따라간다면, 바로 억겁을 거치면서 자기가 노력을 해 봤던들 이익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윤회에 걸려서 항상 끄달리면서 삼계의 고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 뜻 자체가 잘못돼 돌아가기 때문에 망언을 하게 되고, 또는 부처님의 뜻을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들 굴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외도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외도가 외도가 아닌 줄 알고 외도 아닌 것이 외도인 줄 알고, 이것이 둘이 아닌 줄 알 때 비로소 대공이 그대로 여여하게 돌아감을, 우리는 전체가 공했다는 걸 알게끔 되는 것입니다. 어느 거 하나 공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으니 공한 것이요, 보이는 물질은 물질대로 영원치 못하니 공한 것이요, 모두가 공했습니다, 일체가 다.
그래서 물질은 나오는 것도 있고 들어가는 것도 있겠지마는, 물질 아닌 내 생명의 실상은, 절대로 이것은 나오고 들어감도 없는 것이요, 걸림도 없는 것이요, 죽는다 산다도 생사 윤회도 없다는 얘깁니다. 걸리질 않는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꼬박 앉아서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하고 그냥 손을 꼽고 잘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잘되는 게 아니에요.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면서도 똥을 누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내 마음 그 가운데에 참 불성 자체는 항상 꺼지거나 켜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가 발전소라고 비유해도 됩니다. 그 자가발전소의 에너지는 무한량으로 나올 수 있는 에너지며, 밝은 달과 같고 해와 같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여여한 자부처의 그 늠름한, 여여함을 두고도 자기가 코드를 거기다 꽂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코드를 안에다 꽂으십시오.
만날 남한테 빌고만 다니지 마시고요. 잘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재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슨 삼살방이 들었으니깐 이렇게 해 주십시오, 무슨 또 어디가 막혔으니, 북쪽이 막혀서 이사를 못 가겠는데 어디로 잘 가게 해 주십시오, 이런 미신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외도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데도 급급하고, 사랑을 하기에도 24시간 동안에 사랑하는 기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쳇바퀴 돌듯 사람이 살아 나가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어려움을 당해서 되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게, 어떤 게 믿음인지 그쯤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가 남이 이렇게 말한다고 이렇게 듣고 남이 저렇게 말한다고 내 운명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고교한 자기의 그 운명을 어떻게 남한테다 맡길 수 있겠습니까? 남이 이렇게 한다고 이러고 저렇게 한다고 저런다면 쓸모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되 사람 찾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아주 실감납니다. 그것이 그대로 종교입니다.


부처를 이루는 과정

저는 이 생 안에 내 안의 중생들을 조복 받아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가능하다면 스님들처럼 몸 바꿀 준비를 다 해놓고 조용히 앉아서 생을 마감하고픈 보살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희 집 근처의 절에 매일 매일 다니면서 시민선방에 입재하여 몇 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는 절에 계시는 스님께서 “여자는 일곱 번 죽었다 깨나야 성불하고 남자가 돼야 성불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스님께서는 더욱 정진하라고 아끼는 마음으로 해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그 말씀대로 여자의 몸을 받은 지금의 상태로는 성불을 할 수 없는 것이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여자 남자 모습은 다를지언정 어떻게 마음이 둘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근본 씨는 둘이 아니에요. 동쪽과 서쪽이 둘이 아닐지언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둘일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깨달으면 사람 눈도 수가 없이, 헤아릴 수가 없이 눈이 많은데 생각이 어찌 한생각뿐이겠느냐 이겁니다. 여자가 남자도 될 수 있고 남자가 여자도 될 수 있고, 한순간에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고, 일체 만물이 다 될 수 있는데 남자다 여자다 이렇게 갈라놓고, 성불을 하느니 못하느니 한다면 안되지요.
그렇듯이 우리가, 참 묘한 법이 있어요. 아까 눈이 많다 그랬죠? 모습은 이러한 모습이다 할지라도, 모습은 컵이라 할지라도 이 컵이 별의별 역할을 다 해요. 뜨거운 것도 담았다 찬 것도 담았다, 커피도 담았다 인삼차도 담았다, 별 거를 다 합니다. 근데 모습은 하나인데 그 모습의 분신은 수없이, 여러분이 예수님을 갈망하면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내 줄 수도 있고 또는 부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부처님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산신을 갈망하는 사람한테는 산신으로도 나툴 수 있고, 또는 용왕을 내가 생각하고 구원을 청하면 용왕으로 나타내 줄 수 있고, 갖은 모습으로 다 여러분 앞에 나투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한 모습으로 있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어떤 농부네 집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우리가 지금 3대째 가난해서 이렇게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게 없고 이러니 우리 대에는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해 주십시오. 지금 세상에는 자식들에게 농사짓는 것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서울로 보내서 공부를 가르쳐야 하니 이거를 어쩝니까?” 하고 항상 새벽이면 일어나 앉아서 아버지를 부른 거예요. 그랬는데 어느 스님이 하룻밤 묵고 가면서 물었어요. “댁은 뭐 때문에 새벽에 앉아서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기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우리가 지금 3대째 이렇게 내려오는데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지금 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주는 공부를 시켜서 집안을 좀 세우게 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매일 그럽니까?” “매일 그렇게 합니다.” “어느 때서부터 이렇게 나왔습니까?” “지금 일 년 팔 개월이 됐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 스님이 아무 소리 없이 그러냐고 그러고선 갔는데 그렇게 보고 간 게 인연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묻고 간 게 인연이 돼 가지고, 그 해에 10년 전에 만났던 친구가 잘 돼서 와 가지고선 “얘, 우리 동네 가서 장사라도 하자.”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농사는 작은 동생한테 맡기고선 건어물 도매를 했답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선 큰돈을 벌었어요. 큰돈을 벌어서 자식들 대학원까지 다 가르치고 그렇게 일어나더니 늘그막에 자식들은 서울에서 살게 하고 아우는 아우대로 집을 지어서 내주고 자기가 그 집으로 들어가서 거기다가 큰 집을 짓고선 땅과 논을 사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답니다. 그런 얘길 들었어요.
그런 거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지극하면 지극한 보람이 있고 자기 한 것만큼은 꼭 있을 겁니다. 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옛날에 일본 사람이 회사를 하는데 조선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면서 만날 발길로 차고 때리고 이래서 맞고 막 부르트고 그래도 겸손하게 일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일본 사람이 8·15 해방되기 전에 데리고 와서 가르치던 남자한테 그 회사를 맡기고 자기는 큰 회사를 냈어요. 그런데 왜 거저 줬느냐면 세상에 10년이 되도록 때려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이겁니다. 그 보상이 바로 여기 있다, 그러고 준 거예요.
처음엔 지켜보지 않았지만 나중엔 지켜보다 지켜보다, 너무 길게 가다 보면, “아, 이 사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구나.” 하고선 내주는 법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모질고 그렇긴 하지만 보수를 갚는 데 대해서는 아주 끊고 맺는 듯이 갚아요. 그러고 나쁘게 했다 하면 끊고 맺듯이 또 갚습니다. 무서워요, 아주.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다 마음을 잘 쓰면, 마음을 잘 쓰면서 믿음을 가지고 망하든 흥하든 그걸 버리지 않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밟히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 착한 사람은 못살고 웬만하게 그저 악한 사람이 더 잘 살더라.” 이런 말들을 보통 합니다. 그런데 착하다 그래서 너무 착한 일만 한답시고 자기 앞에 다가오는 것도 “너 먹어라!” 이렇게 줄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잘하고 못하고를 다 자기 주인공한테 맡겨 놓고서 모든 것을 일임하고 정도에 넘치지 않게 잘 판단을 해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법이자 여러분의 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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