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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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스님의 스님이야기】 원범스님
화악산 절벽위 조그만 암자
겨울준비에 여념이 없다

아마도 대개의 스님들도 그러하겠지만 많은 도반들 중에 그래도 제일 기억나는 도반은 행자도반이리라. 오랜 세월 정진하신 노스님들께서도 “아련한 추억 속에 똬리를 틀고 놓아주지 않는 놈은 행자도반뿐” 이라고 말씀하셨다. 행자도반이 좋은 것은 어려웠던 시절 힘들었던 생활이 초발심의 견고한 신심과 맞물려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엊그제 관악산엘 다녀왔다. 아직은 푸르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산 정상부터 알록달록 번져 가는 붉은 단풍의 채색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수행의 ‘중물’은 얼만큼 들었을까를 생각하니 얼굴이 단풍색깔만큼이나 붉어진다. 이런 날은 철 이르게 떨어져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조차 서글프게 느껴지게 된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푸른하늘위에 흰 구름이 떠있다. 거기에 운주암이 있고 내 그리운 도반의 모습도 보인다. 산이 높아 구름도 머물다 간다 하여 운주암이었던가.
행자교육 기간중 우리는 유난히도 장난이 심했다. 엄격한 규율과 진중한 행자교육 기간중의 묵언조차도 우리의 장난을 막지 못했다. 습의사스님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눈짓 손짓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장난을 치곤 했다. 어떤 날 내가 그의 발우에 천수물을 가득 따른 앙갚음으로 내 발우랍시고 숭늉을 가득 부어 버린 일이 있었다. 천수물은 발우를 닦고 난 후 퇴수를 할 수 있지만 숭늉은 퇴수를 할 수가 없다. 다 마셔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반이 숭늉을 따른 발우가 내 발우가 아닌 옆자리의 발우였다.

하필이면 그 많은 교육생중 가장 나이 많은 노행자 발우에 숭늉을 따른 것이었다. 절 집안에서 공양시간은 엄숙하다. 또한 묵언정진중인 행자교육 기간중임에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며 인상쓰는 노행자의 맞은 편에는, 처음엔 “너도 당해 봐라”는 듯 눈웃음치며 득의양양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다. 쩔쩔매는 그 도반의 발우에 내가 재빨리 숭늉을 모두 넘겨줌으로써 그 도반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휴식시간 올챙이배를 퉁퉁거리며 두고 보라며 복수를 다짐하던 그 도반의 얼굴이 오늘은 무척이나 그립다.


경북 청도 화악산 가파른 절벽위 조그만 암자에 그가 있다. 서울에 오기 전 운주암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공양주가 없어 라면을 끓여주며 미안해하는 그에게 “스님은 여기서 평생 살아도 되겠네?” 하고 넌지시 물어 보았더니 “무슨 소리, 중이 공부해야지. 난 도량정비 끝나면 걸망 메고 참선하러 떠날 거야. 대중과 같이 공부해야 중이지” 하며 정색을 하던 그다. 그가 운주암에 처음 온 것이 한 삼사 년쯤 되나보다. 처음 이 암자는 조계종 사찰임에도 수년간 비워져 있다가 어느 무당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재판 끝에 겨우 찾아 원범스님이 맡은 것이다. 워낙 산세가 험한 곳이라 모든 일을 혼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살림살이였다. 산에서 땔감을 구해다 장작을 패고,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고 좁은 길을 다듬어 큰길을 내고 관공서를 찾아다녀 겨우 도로를 내고… 그 모든 것을 그 혼자의 힘으로 일궈낸 것이다. 법당에 비가 새고 식당겸 요사채는 다 허물어진 암자를 그는 최고의 기도도량으로 만들려고 원을 세웠다. 여기까지가 그의 할 일이라면서… 도반 스님의 거처는 법당 뒤 조그만 공방 하나다. 그곳에서 그는 불사준비를 하고 생활을 하고 있다. 운주암은 최고의 풍광을 지닌, 내가 본 곳중 몇 안되는, 산세가 좋고 깎아지른 벼랑 위에 우뚝 솟은 멋진 도량이다. 이제 그곳에 목탁소리 드높고 불사준비 한창이란다.

얼마 전 원범스님에게 전화한통을 받았다. 비록 가건물이지만 요사 한 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기도객이 와도 쉴 수 있는 거처 하나 없었다. 도반스님이 와도 쉬지를 못하고 차한잔 마시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올라와서 그냥 가는 도반에게 무척이나 미안했던지 “스님 이제 오면 며칠 쉬었다 가도 돼” 라면서 껄걸 웃었다.

올 여름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을 때 원범스님은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비가 새는 법당, 무너진 언덕등을 보수하느라 밤잠도 설쳤다고 했다. 이제 화악산 골짜기에도 단풍이 아름답게 들었지만, 스님은 겨울준비에 여념이 없다. 눈이 오면 산중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 찬거리며 법당보수며 땔감이며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누런 밀짚모자 하나 눌러쓴 채 검게 탄 얼굴로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스님. 이 가을날에는 또 얼마나 탔을까. 어렵사리 구한 짚차의 바퀴가 일년도 되지 않아 다 닳았다며 투덜대던 스님. 모쪼록 운주암 불사가 원력대로 다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화악산 골짜기 골골마다 목탁소리, 기도소리 끊이지 않는 기도도량으로 거듭나리라.

■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

200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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