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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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스님의 스님이야기】 지산스님
방일 허용않는 굳은심지
불의보면 동분서주 대책

산에 올라 보면 산내음이 있다.

풀향기 같지만 풀향기도 아니요, 솔향기를 닮았지만 솔향기도 아닌 독특한 내음이다.

산내음은 어느 하나의 냄새가 아니다. 풀과 나무, 바람과 구름의 냄새다. 이 모두가 대자연의 품속에서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산내음이 된다. 사람에게도 내음이 있다면 어떨까. 가을산 깊어가는 계절속에서 산야를 붉게 물들이는 단풍이 아름답다. 붉어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푸르고 누렇고 주홍색을 품고 있어 더욱 아름답다. 우리들 마음에 색깔이 있다면 어떤 색일까. 늘푸른 산내음과 붉은 단풍 색깔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지닌 그런 스님이 있다. 어느 봄날, 홍류동 계곡 벚꽃이 유난히 흐드러지게 피어 눈꽃잎이 휘날리던 날 밤에 평소 가까운 스님 몇몇이 홍류동 계곡 고운 최치원 선생이 노닐었다는 정자에 모였다. 달빛조차 고왔던 밤, 주체할 수 없는 흥에 겨워 몇 잔의 곡차를 주고받았을 때 곱사춤을 추며 유난히 좋아했던 스님이 있었다. 지산 스님이다.

풍류 좋아하고 재주 많은 스님이었다. 무엇보다도 일복 많아 괴로운 스님, 그러나 자신의 수행길에서 한치의 방일도 허용치 않는 굳은 심지를 지닌 스님이었다. 홍류동 계곡에서의 밤 벚꽃놀이를 즐긴 며칠 후 지산 스님은 읽어보라며 나에게 책 한 권을 가져왔었다. 밑줄까지 그어놓은 책의 제목 또한 재미있다.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 아마도 그 날 많이 취해 버린 나에게 주는 무언의 경책이었으리라. 체구는 작아도 능히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배포와 능력을 지니고 오늘도 지리산 실상사에서 천일기도와 함께 원주소임을 살고 있을 스님. 오늘처럼 가을햇살 따가운 날 불현듯 그 스님의 차 한잔이 그립고 그의 산내음이 맡고싶고 그의 가슴속에서 붉게 물들어 갈 ‘중물’의 색깔이 보고 싶어지는건 왜 그럴까? 지난 94년 조계종단이 삼선개헌 등으로 매우 시끄러울 때 산중의 학인들은 작금의 종단사태에 우려를 금하지 못하면서도 그냥 학업에만 전념하고 외면할 것인가, 적극 동참하여 개혁의 일익을 담당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때 홀연히 일어나 “지금 종단개혁의 물꼬를 틀지 못한다면 차후 종단개혁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며 대중을 이끌었다. 아수라장의 총무원 건물앞에서 핸드마이크를 손에 쥐고 사자후를 토하며 학인들을 지휘 독려하던 모습에 평소 말이 없고 책만 보는 스님인줄 알았던 나는 저윽이 당황했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스님, 지산스님은 그런 스님이었다. 어느 조직체든 유독 일거리가 많은 스님이 있다. 지산스님이 그랬다. 종단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야산 골프장 건설 때문에 또 한번의 홍역을 치러야 했다. 스님은 그때까지 활동하던 전승련 소임을 그만두고 가야산 골프장건립 반대 대책위를 맡아 불철주야 동분서주했다. 고생이란 고생은 아마도 그때 한꺼번에 했을 것이다. 무려 한달 보름여만에 골프장건설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이끌어 냈으며 몇 년을 끈 송사 끝에 결국에는 가야산 골프장 건설계획을 백지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그때 지산스님의 노고가 없었다면 골프장건설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지산스님은 강원생활 내내 일에 쫓겨 다녔지만 짬을 내어 마을의 꼬마들을 무척이나 챙겼다. 해인사 신부락의 꼬마들이 제일 좋아하는 스님이 ‘지산시님’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꼬마들과 어울려 산중암자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은 영락없는 천진불을 닮았다. 바쁜 강원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수행을 방일하지 않았던 스님, 강원 교재인 수다라며 다로경권, 신행지 등의 편집일을 도와 대중스님들을 편안케 하였던 스님. 왜 그 스님에게만 유독 산내음이 나는 걸까? 왜 그 스님에게는 단풍보다 더 고운 붉은색의 가슴이 연상되어지는 걸까?지금 지리산에는 지리산댐 건설반대 지리산 살리기 운동이 한창이라던데 스님의 수행에는 지장이 없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워낙 심지 굵은 스님이라 별 걱정은 없다. 몇달전 실상사에 들러 차한잔 마시고 돌아서는 내게 기도기간중 산문 출입을 금하고 있으니 여기까지밖에 배웅을 못해 미안하다며, 곱게 접은 인삼꽃차 한봉지를 선물로 주던 그를 남기고 돌아서던 길에 그가 강원시절에 지었던 시 한수가 생각났다.


장경각 법당/법보전은/10여명이 들어서면/빼곡하게 가득찬다/조그마한 까닭에/관람객들의 소음이/여간 뒷통수를/때리는게 아니다./소음?/“엄마, 저기 앉은/부처님눈은 졸고 있어”/“이녀석, 스님들 기도하는데/그런 말 하면 못써”/“이잉~, 졸고 있는데…”
지산 스님의 산내음을 맡을 수 있을것 같은 시이기에 지금도 소중히 지니고 다닌다.

그러다 보면 행여 나에게도 산냄새가 배지 않으려나…
■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

200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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