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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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스님의 스님이야기】 환암스님
한철 빠짐없이 20여년 안거
세상사 끄달림 없는 선객

‘천지는 춘하추동을 향하게 하며 만물을 양육해 낸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다. 나 또한 말없기를 좋아한다.’ 공자의 말씀이지만 자연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생명을 잉태시킬 줄 알며 부르는 법 없어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볼 수는 없어도 느낄 수는 있는 계절이 바로 이 무렵이 아니겠는가. 벌써 입동이다. 풀먹인 무명옷 사이로 제법 날카로운 바람이 파고 든다. 늘 푸를줄만 알았던 산하대지가 한생각 돌려 옷 갈아 입더니 이제는 그 허물마저 귀찮은 듯 던져버린, 그야말로 말이 필요없는 계절의 한 모퉁이에 내가 서 있다. 중생의 삶 또한 버리고 또 버려 결국에는 그 마음조차 버려야 하거늘 아직도 버리지 못한 무수한 기억들의 잔흔이 참으로 부끄러운 날, 무심코 쳐다 본 달력의 동그라미속에서 동안거 결제일이 며칠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직 장판때조차 묻혀 보지 못한 몸뚱아리지만 그래도 결제철만 되면 몸이 후끈 달아오를 수 있다는 것은 이십여년간 한철도 빠짐없이 정진하며 푸른 청산의 심장과 흰 구름의 사지를 닮은 한 선객의 넉넉한 그림자가 있어 발심의 고삐를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추석연휴가 끝났다지만 그래도 귀경길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던 날 밤늦게 환암스님이 찾아왔다. 대장경 전산화작업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는 종림스님과 대중들에게 싱싱한 지리산 송이 버섯의 맛을 한시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혼잡한 버스속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달려온 것이라 했다. 택배나 우편 등의 전달방법도 있었겠지만 굳이 밤늦은 시간이라도 바람처럼 왔다가 아침일찍 길 떠나며 환히 웃는 환암스님의 뒷모습에서 세상사에 끄달림없이 오직 한길을 가는 선객의 여유로움을 볼 수 있어 촉촉한 산이슬이 가볍게 가슴을 적시고 스쳐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함께 할 줄 알고 함께 누릴 줄 아는 그의 성품은 오랜 대중생활에서 습득된 체험의 습관이 아니라 태어남에서부터의 천성인줄 알기에 자연을 닮아가는 허허로운 그의 걸음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유달리 부지런한 환암스님. 그래서 인지 옷조차 늘 무명옷만 입는다. 보통 스님들이 입는 옷이 무명 등과 같이 풀을 해서 입는 것과 기지 등으로 세탁해서 그냥 입는 옷이 있는데 환암스님에게는 기지옷이 없다. 풀옷은 손질하기 여간 까다롭지 않다. 세탁을 해서 바짝 말린 다음(그렇게 하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풀을 먹이고 다시 바짝 말린 후 물을 뿜어 응달에서 서서히 말려 곱게 개어 자근 자근 밟아줘야 한다. 그런 다음 다림질을 하게 되는데 다릴때도 옷 안섶 이음새 부분의 날개부터 다린 후 바깥쪽 면을 다려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는 풀옷을 입을 수 없다. 그에게는 이 무명옷 두어벌과 겨울을 나기 위한 누비옷 한벌만 있을 뿐, 잡다한 옷가지가 없는, 간편한 선객의 필수품만 있을 뿐이다. ‘일심이 청청하면 일신(一身)이 청정하고 일신(一身)이 청청하면 다신(多身)이 청청하고 이와같이 중생의 원각이 청정하리라’ 라는 부처님 말씀이 <원각경>에 있다. 환암스님을 대하다 보면 그와 같음을 느낄 수 있다. 환암스님에게는 일체의 삿됨이 없다. 항상 부지런히 갈고 닦아 수행의 군더더기 없는 선객의 기품으로 진솔한 내면을 가감없이 표현할 줄 아는 그런 스님이기에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수행의 척도가 넓어지고 발심이 된다. 그 많은 세월을 선방에서 정진하여 왔음에도 법랍과 속랍에 걸맞지 않게 미소년의 홍조띤 얼굴 모습으로 대중을 편안하게 할 줄 아는 스님. 약간은 수줍은 듯 여린 웃음을 항상 웃고 있지만 걸림없는 선객으로 수행하여 왔기에 가슴속에는 부처의 칼날을 항상 예리하게 갈고 닦고 있음을 알고 있다. 몇해전, 은사스님의 간곡한 권유에 못이겨 주지소임을 한 두 해 살다가도 “이건 내 할 일이 아니다”라며 거침없이 뿌리치고 선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칼날같은 성품을 지닌 스님이다. 그러한 스님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매년 안거철만 되면 그의 수행을 닮고자 하는 마음에 몸이 뜨겁게 달구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스님들의 겨울나기가 시작된다. 지금쯤 환암스님은 걸망 하나 훌쩍 짊어진 채 산길을 걸어 선방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천지로 집을 삼고 백운으로 벗이 되어
높은 산 깊은 골을 몇 굽이나 지냈던고
연운중첩 천만리에 어느 곳이 성지련가”
늦가을 산중의 바람결에 홀홀이 날려가는 무수한 낙엽들의 망상이 새로운 생명의 밑거름이 되듯 지금 나의 망상 또한 새로운 발심의 씨앗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와 함께 올 겨울 용맹정진하는 환암스님과 모든 스님들의 ‘한소식’이 크게 울려 뭇 중생들의 고통과 번민을 단번에 떨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본다. ■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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