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앞만보고 뚝심정진
산중의 겨울밤은 참으로 길기만 했다. 이른 저녁공양을 마치고 나면 예불 간경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어느새 삼경(밤 아홉시) 종소리가 조용한 산사의 밤하늘을 때렸다. 이제 취침시간이다. 바깥 마을에는 아직 초저녁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겠지만 불꺼진 산중에서는 꽤 밤이 깊은 시간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할 시간이다. 이르게 먹은 저녁공양은 빠듯한 공양 죽비소리에 시간맞춰 먹는지라 배도 채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화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 전이다. 때문에 지대방에 한해 밤 열 한시까지 주어지는 개인학습 시간에는 낮에 요령껏 꼬불쳐 둔 간식거리를 소매밑에 숨겨 행여 누가 볼새라 책속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먹는 맛이란 정말 꿀맛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의 짜릿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 중 하나다. 간식거리가 풍족하지 않을 때라 거의 매일이다시피 누룽지가 유일한 간식거리가 되었던 날들의 이야기지만 이것도 동작빠른 스님이라야 챙길 수 있었다. 행자님들의 공양푸는 시간에 맞춰 미리 공양간 한켠에 서서 대기하고 있으면 상행자가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누룽지 한줄을 주걱으로 주욱 갈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주곤 했다. 그걸 개인 관물함에 숨겨 두었다가 깊은 밤중에 몰래 먹는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누룽지를 이빨로 부숴 먹으면 그 ‘오도독’ 소리 때문에 혹 상판스님께 들킬까봐 입 속에 소리 없이 뚝 잘라 넣고는 침으로 소리 없이 녹여 먹곤 했다. 급한 마음에 가끔씩 그냥 삼키면 덜 녹은 누룽지가 목에 걸려 따갑고 쓰라림을 감내해야 했었다. 그래도 마냥 좋기만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강원한달 수령비가 이만원 이었으니 그 돈으로 책 한두권 사면 남는게 없었던 터라 자연히 공부도 좋지만 먹을 것을 더 밝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도반중에 ‘꽃돼지’란 별명을 가진 스님이 있었다. 유난히 든든한(?) 몸집에 잘 웃긴다 하여 생겨진 별명이지만 그 덩치를 감당하려면 아무래도 먹을게 많이 부족하긴 부족했었나 보다. 어느 날 이 스님께서 사시공양 후 식곤증을 못 이겨 졸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졸다 게슴츠레 눈 떠보니 지대방 한가운데 큰 죠리퐁 하나가 보였다. “아니, 죠리퐁?” 이 스님, 누가 채어 갈새라 얼른 집어 입안에 날름 털어 넣었는데 “이게 무슨 맛?” 달콤한 과자맛 대신 입술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간식거리 귀한 때에 방바닥에 죠리퐁이 떨어져 있을리 만무, 그 스님은 죠리퐁과 모양이 비슷한 벌을 삼켰던 것이다. 입술이 퉁퉁부어 올라 만딩고가 된 채 몇 날 며칠을 마스크를 쓰고 다니던 이 스님, 도반들이 놀려 대자 “진짜루 내눈에는 죠리퐁으로 보였다니께” 짜증섞인 항변과 유머있는 재치로 그 와중에도 대중스님들을 즐겁게 해 주려 노력하던 스님이었다. D대 사학과를 졸업한 이 스님 웃기는 행동만큼이나 출가사유 또한 대단히 이채롭고 재미난다. 대학졸업 후 친구들과 무전여행을 했었나 보다. 그렇게 전국을 누비고 다니다 보니 돈 떨어지고 배고프니 환장하겠더란다. 차마 점잖은 체면에 구걸은 못하겠고 머리를 짜내 꾀를 쓴 것이 마침 출가한 친척누님이 가까운 절에 계시더란다. 그래서 그 법당의 보시함을 털기로 작정하고 절에 들렀다가 그길로 내친 김에 더 큰 도둑(?)이 되기로 결심하고 삭발 출가하였으니, 여하튼 그 괴짜성품은 출가전부터 있었나보다. 이 스님의 기억력이 너무 좋아 도반들이 무심중에 한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써먹는다고 해서 ‘공포의 삼겹살’로도 불리우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그러나 이 스님, 도반들이 선방에 한 두철 살면 그만일 것이라고 놀려댔건만 정말 발심이라도 한건지 강원졸업 후 여태 동안거 하안거 모두 결제 들어가 몇 년 동안이나 여법하게 정진하고 있으니 모두가 부끄러워 했다.
스님을 찬찬히 살펴보면 항상 천진하고 익살맞은 행동으로 도반들의 여가시간을 즐겁게 해주고 서먹해진 도반관계를 재빠른 재치와 웃음으로 화합하게 할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길은 추호의 흔들림 없는 뚝심으로 정진하고 주변사람들의 사소한 아픔까지도 보이지 않게 챙기며 위무해 줄줄 아는 스님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래서 도반들 사이에 인기 ‘짱’이다. 얼마 전 해제철에 여기저기 다닐 곳 많은데 버스나 기차 타면 시간을 너무 뺏긴다고 해제금 털어 거금 오십만원 주고 고물차를 한 대 샀다. 차를 운전할 때도 그 성질 그대로 절대 옆과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차는 오직 앞으로 가기 위해 있는 거라며 앞으로만 운전할 줄 아는 스님. 그래선지 자신의 공부도 절대 뒤돌아보거나 방일하는 법이 없다.
우직한 성품으로 오늘도 수행의 숲길을 묵묵히 헤쳐나가고 있을 스님. 올 동안거 해제철에는 진짜 부처의 법을 훔친 큰도둑(?)이 되어 “할”소리 한번 하시길…■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