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호산스님의 스님이야기】 스님과 어머니
마주치면 그냥 합장반배
그리움 눈빛하나로 대신

정리수(情離水)라는 말이 있다. 옛날 어떤 처자가 남몰래 스님을 사모하다 우연히 스님들이 공양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발우를 깨끗이 씻어 헹군 물을 마시는걸 보고 그만 정이 뚝 떨어 졌다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스님네들은 삼시 공양 때마다 이 정떨어지는 물을 마시는 셈이 되는데 스님들 입장에서 보면 정떨어지는 물이라는 표현보다 정을 끊게 하는 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싶다. 옛날 스님들은 정이 농후하면 도닦는 마음에 방해가 된다 하여 무척 경계하였다. 아마도 이미 출가하여 출격 장부가 되었으니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하루 세 번 이 정리수를 마심으로 자신을 경책하고 수행에만 전념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에게 주어진 인연을 끊을 순 있다 하더라도 부모님의 살과 뼈를 받아 태어난 몸으로 어찌 부모의 연마저 쉽게 끊을 수 있겠는가? 혹 그것이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도심에 방해가 된다 하여도 그것이 일도양단 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닐거다. 스님들 중에서도 유난히 독한 마음을 가지고 세속의 정을 끊고 정진하는 스님들이 많다. 그러나 그 스님들의 내면속에 잠재된 의식은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내가 아는 어떤 스님이 있다. 많은 대중들속에서도 유난히 피부가 희고 고왔으며 항상 점잖고 넉넉한 성품으로 선 후배 스님들을 공경하고 잘 이해할 줄 알며 마음속 창공에 티끌마저 없어 보이는, 늘 푸른 눈동자를 지닌 해맑은 얼굴 모습을 한 스님이다. 원체가 조용하고 말이 없는 스님이라 있는듯 없는 듯 하면서도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아 대중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그런 스님이었다. 오랜 시간을 그 스님과 지낸 후 우연히 알게된 사연 하나.


해인사에 가끔씩, 아주 가끔씩, 잊혀질 만 하면 보이고, 그렇게 한 며칠 보았다 싶으면 바람이 스친 듯 보이지 않는, 조용하고 부지런하며 단정한 노보살님이 계셨다. 작달막한 체구에 허리가 약간은 굽었지만 의젓함과 품위를 잃는 법 없이 열심히 기도하는 그런 보살님 이었다. 법당에서 기도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후원에서 채공일을 도와주시고 또 어느틈엔가 도량청소를 하고 계시는, 무척이나 부지런한 노보살이었다. 도량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깊게 패인 주름살 아래로 그저 한량없는 존경의 눈빛으로 합장 반배함으로써 스님들을 진심으로 공경할 줄 아는 그런 노보살이었다. 그 노보살에게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 막내아들이 출가 결심을 밝히자 잘 결심했노라고 격려해 주고 웃으며 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현듯 아들이 보고싶어지면 그렇게 바람처럼 왔다가 사찰의 이곳 저곳을 청소하고 일을 도와주고 기도도 하면서 먼발치에서라도 자랑스런 아들의 수행 모습을 지켜보다가 홀연히 떠나곤 했다. 그 보살의 막내아들이 그 스님이었다는 것을 우연히 누군가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은 그 스님과 지낸 지 삼사 년이 지났을 때였다. 돌이켜보면 수많은 세월을 같이 부대끼며 살아왔는데 왜 우리는 몰랐을까? 그것은 두 모자의 성품이 너무도 올곧게 닮아 있어 서로의 수행과 기도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마음의 고삐를 조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눈에는 모자의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도량에서라도 마주치면 그냥 합장 반배의 예만 올리고 마음속 절절한 그리움을 눈빛 하나로 대신하고 그냥 지나쳐야 했던 스님과 그 어머니. 깊게 패인 세월의 고통을 묵묵히 아들의 수행모습을 지켜보면서 혼자 삭여왔을 인고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뒤에서 지켜봄을 뻔히 알면서도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힘든 수행의 길을 혼자만의 그리움을 안고서 이겨 나갔을 스님. 그 모자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인연의 정(情)이 얼마나 끈끈한 지를 느낄 수 있었다. 출가한 자식의 뒷바라지를 모든 스님들의 공경과 도량청소, 기도로 대신 하고 그 자식은 그 어머니의 사랑을 치열한 수행으로써 갚아 나갈 줄 아는 스님. 막내 아들의 수행이 깊어지면 질수록 정작 당신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가건만, 오히려 그 세월의 고통을 자랑스러워 할 줄 아는 노보살님과 연로하신 어머님의 모습을 지척에 두고 보면서 자신의 공부에 방해가 될세라 그냥 남남처럼 무심히도 지나치면서 그 어머님의 고마움을 가슴에 묻어두고 지내는 스님. 두 모자의 아름다운 수행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깊어 가는 계절의 초입에서 노보살의 무병장수와 스님의 수행공부가 일취월장하기를 가만히 빌어본다.

■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

2000-11-29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