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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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스님의 스님이야기】법인스님
염불 잘하고 수행 잘하고
힘든일 마다않고 묵묵히

겨울 산에는 어둠이 일찍 온다. 짙은 산그늘 속에서 어둠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오면 저만치 마지막 남은 햇살이 산등성이 한 모퉁이에서 끈질기게 버텨 보지만 이내 힘없이 스러지고 만다. 그렇게 모든 삼라만상이 어둠 속에 묻히고 나면 겨울밤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밤이 길면 그만큼 꿈도 많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이 많은 날에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지만 대중생활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삼경 종소리가 울린 얼마 후 대중스님들이 곤히 잠들어 숨소리가 잦아들 즈음, 소리 없이 궁현당문을 열고 나섰다. 그저 생각 많은 날 밤에 어쩌다 한번씩 찾는 곳이지만 잔설이 옅게 깔린 장경각 뒤편 수미탑에서 해인사의 야경을 내려다보면 이상하게도 잡념이 씻은 듯이 사라지곤 했었다.

그날 밤, 법인스님을 그곳에서 만났다. 아마 법인스님도 나처럼 생각 많은 날 이곳을 찾아왔던가 보다. 그때까지 엄격한 강원 대중생활에 익숙치 못했던 나와, 상반이었던 법인스님간에 개인적인 만남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강원생활이란 시간적 여유도 없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날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 해 보는 승가생활의 서투름, 도반스님들과의 갈등, 수행생활에서 오는 번민 등을 놓고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격의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기실 그때 나는 강원생활의 어려움과 마음의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강원을 잠시 쉴까도 깊이 생각해 보던 때였다. 그날 법인스님은 상반스님답게 모든 것을 이해하여 주었고 자신도 그런 문제로 많이 갈등해온 적이 있었다며 세심하게 조언하여 주었다. 그날의 조언이 강원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결국은 졸업까지 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약속없어도 가끔씩 달 밝은 밤이면 수미탑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설익은 생각이었지만 인생과 철학을 논했고 종교와 수행을 이야기하면서 겨울바람의 매서움을 녹여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전승련 학인 대회가 해인사에서 열렸다. 많은 대중스님들이 준비관계로 고생을 했지만 특히 법인스님이 유독 고생이 많은 소임을 맡았었지만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대중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었다. 어른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전야제는 전국의 승가학인들이 모두 모였다는 반가움에 약간은 들떠 있었다. 웃음과 해학, 재능을 뽐낼 수 있는 장기자랑에 느닷없이 법인스님이 나섰다. 그리고는 대중가요인 ‘수덕사의 여승’을 멋드러지게 불러 제꼈다. “아니 웬 스님이 이렇게 노래를 잘해?”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고 노래를 마친 법인스님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지없이 대중스님들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단연 그날의 주인공이 되었다. 평소에 염불솜씨가 좋아 노래도 잘 하겠거니 생각은 했었지만 명가수 뺨치는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에 강원에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강주스님께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 “남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며 해인사를 떠난 몇 년 후 지리산 서암으로 법인스님을 찾아갔었다. 도량에서 법인스님을 찾을 수 없어 한참을 헤맨 후에 간신히 허름한 작업복과 온몸에 돌가루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눈과 입술만 보이는 법인스님을 찾을 수 있었다. 인부들과 같이 섞여있어 빡빡 깎은 머리가 아니면 쉽게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리산 서암은 그의 은사스님께서 큰 원력을 세워 십년 불사를 하고 있으며 또한 틈틈이 화엄경 금니사경을 하며 수행하고 계시는 도량이다. 이곳에서 법인스님은 강원졸업 후 여태 이렇게 생활하고 있으니 뚝심과 근력이 대단한 스님이다. 종단이나 다른 곳에서 소임자리를 권해도 자신은 산승일 뿐이며 산승은 산을 떠나는 게 아니라며 굳이 은사스님과 함께 그 힘든 도량불사를 고집하며 묵묵히 일하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노래 잘 부르고 염불 잘 하는 스님. 인물 좋고 성격 당차며, 의리 있고 수행 잘하고 돌쇠처럼 꿋꿋이 자리지킴이 잘하니 만약에 승가에 팔방미인이 있다면 이런 스님이 아니겠는가 싶다. 겨울철에는 불사가 조금은 한가할 테니 올해가 가기 전 내복이나 한벌 사서 작설차 한잔 얻어 마시러 가야겠다. 그리고 수미탑 아래서 못다한 이야기를 밤새워 듣고 둥근 보름달 같이 꽉 찬 성품을 배워와야 겠다.

■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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