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호산스님의 스님이야기】영호스님
천진한 웃음으로 첫만남
올 동안거 어디서 보내는지

사시 삼철을 관광객이며 등산객에게 몸살을 앓더니 짧은 계절의 긴 한가로움으로 겨울 품에 깊이 잠들어 있다. 간밤에 내린 함박눈 속에 홀로 버티던 늙은 소나무가 제몸에 걸터앉은 눈 더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며 내는 옅은 파열음만이 계곡의 바람 속에서 외마디 소리를 질렀을 뿐 겨울산은 그저 침묵 속에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리 없는 침묵 속에서도 결제중인 스님들의 치열한 구도의 열기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며 길을 가르고 적정삼매에서 부처님의 혼과 법을 닦고 있으리라. 이제 얼마후면 성도일이다.
해인사에는 해마다 부처님 성도일에 맞춰 산중의 모든 스님네들이 용맹정진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만큼은 강원의 학인 스님들이나 소임 보는 스님들, 그리고 선방의 수좌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양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좌선해야 한다. 오후불식은 물론이고 절대 잠을 자지 못하며 입선 십분이 지나도 큰방에 들어오지 못하면 퇴방조치가 되는 자못 엄격한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이다. 선방에 오래 계신 수좌스님 들이야 익숙한 생활일 수 있겠지만 아직 장판때 덜 묻은 강원의 학인들은 여간 힘드는 게 아니다. 특히 오후불식을 하면 배에 힘이 없어 머리는 맑을지언정 좌선의 자세는 흐트러지게 마련인데 그렇게 삼사일 이야 어떻게 버틴다지만 사오일이 지나면 쏟아지는 수마와 다리의 저림이 더욱 깊어져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경직되기 십상이다. 처음 입선때 들었던 화두의 몸통은 커녕 꼬리도 보지 못하고 깊은 망상 속에서 헤매게 되는데 이럴 때 죽비의 효능은 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들지 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눈꺼풀은 더욱 무거워지고 두 무릎이 아프고 저려서 요령 필 궁리만 하게 된다. 그때였다. 앞에 앉은 선방 수좌스님께서 싱긋 미소를 지으며 윙크를 보냈다. 아마도 한 생각 놓고 정진하라는 당부와 긴장의 고삐를 잠시 늦추고 여유를 가지라는 무언의 메시지일 게다. 그것이 영호스님의 첫모습으로 기억된다. 영호스님은 해인사 선방에만 수십 년간 수행한 구참납자다. 그러나 항상 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을 잃지 않고 장난을 무척 즐기는 스님이다. 어쩌다 도량에서 만나면 항상 윙크를 잊지 않고 해주며 책 한 권 사달라고 조르면 서슴없이 외상 줄을 긋고는 사 주는 따뜻한 성품의 스님이다. 해인사를 떠난 몇 년의 시간 속에서도 그 웃음과 미소가 간간히 생각나더니 불교대학 졸업생들과 성지순례때 용문사에서 스님을 잠시 만날 수 있었다. 법당참배를 마치고 지장전에 들른 후 목탁치고 계시는 스님이 안면이 있어 유심히 보았더니 영호스님이었다. 도무지 선방수좌였던 영호스님과 목탁이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선방에 오래 있다보니 병을 얻게 되고 병을 얻으니 쉴 곳이 마땅치 않아 도반스님이 주지로 있는 이곳에 잠시 요양하며 약값이라도 받아 쓸려고 왔는데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주지가 바뀌고 보니 당장 올데갈데 없다고 했다. 다시 선방에 가서 정진하려니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또 젊은 수좌스님들과 같이 정진하려니 근기가 달려 몹시 힘들게 느껴져 자신감을 잃었다고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밥값이라도 하고 지낼려면 목탁을 잡아야 하니 이 지장전을 맡아 기도중이라고 했다. 같이 나누는 차한잔의 여유 속에서도 예전의 그 호탕하고 밝은 웃음을 보지 못하고 일어서며 “우리 종단이 안고 있는 과제중의 하나가 노후복지 문제일텐데 오랫동안 공부하던 스님이 막상 잠시 쉬려고 하면 몸 하나 의탁할 곳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위로하는 나에게 “무슨 소리, 내가 좀더 열심히 정진하고 수행했으면 병도 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색을 하던 영호스님이었다. 그러나 일주문까지 배웅하며 너털웃음을 짓고 돌아서는 그 스님의 모습이 왜 그렇게 공허하게 들렸으며 초라하게 보였을까. 언제 또 한번, 함박웃음을 지으며 윙크하는 영호스님의 모습을 보게 될까를 생각하니 그저 착잡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점에서 외상 줄을 그어가며 책을 사 주시던 영호스님. 올 동안거는 어디에서 정진하고 있을지… 며칠 새에 바람이 무척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바람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겨울산을 잠에서 깨우기는 힘들다. 스님들도 겨울 산처럼 푹 쉬어 갈수 있는 그런 여정은 언제쯤 마련되어질까.

■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

2000-12-20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