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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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스님의 스님이야기】경흥스님 (끝)
누비옷 한 벌 사철 지내
불이익 감수하며 의지대로

가을의 바람은 쓸쓸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한때 길가 보도블록 위에서 철모르고 나뒹구는 낙엽들을 치워버려야 겠다는 생각에 온몸으로 밀어붙여도 보았지만 급기야 힘에 겨워 더욱 흐뜨려 놓았을 뿐이다. 뭇 사람들의 발밑에 깔려 아우성하며 바스라져 가는 낙엽들을 볼 적마다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워 스치는 사람들의 외투깃을 실없이 세워주고, 흩날리는 머리칼의 향내만 좇다 이것이 낭만이라고 그저 자신을 위무해 버리곤 말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겨울의 바람은 매서웠다. 부딪치는 사람들의 지위고하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정없이 귓볼을 후려쳐 움추려들게 하거나 양지쪽 한켠에 쪼르르 모여 숨어든 낙엽조각들과 생활의 파편들 마저 인정없이 휘몰아쳐 쓸어버리는 비정함을 가지고 있다. 만약 사람들의 마음에도 바람이라는 것이 있다면 전자는 일반 중생의 바람과 비슷할 것이요, 후자는 출가사문의 바람과 흡사할 것이리라.

마음은 항상 절에 있고 싶다고 해도 몸은 여전히 생활의 굴레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신앙생활의 한 조각만을 움켜쥐고서도 만족해 하는 중생심의 마음이 가을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오직 이 길이다 싶으면 우직하게 그대로 사정없이 밀어붙이고 마는, 어쩌면 조그만 방일의 자비심조차 허용치 않는 출가사문의 마음이 겨울바람과 같으리라. 옛날 노스님들께서 가장 경계하며 가르치신 말씀중의 하나가 “출가의 인연이 지중하여 스님 몸 받기도 어렵지만 더욱 더 어려운 출가는 은사출가이니라”며 마음이 한곳에 놓여 버림을 경계하셨다. 모든 것을 떨치고 이미 출가하였지만 기실 승가에는 또 하나의 굴레가 씌워져 있는데 그것이 은사와 사형 사제 등으로 엮어진 문중의식이다. 작금의 교계가 안고 있는 큰 맹점중 하나가 문중이란 굴레속에 매여져 더 큰 출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데서 기인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를 버리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당장 거처가 확실치 않아 여기저기 부대끼다 짐 하나 풀 곳 없이 운수행각을 해야만 한다. 물론 선방이나 기도스님처럼 일정기간 한 곳에 정착할 수도 있겠지만 해제철 짐풀 곳 없이 헤매는 처지거나 그런 근기마저 없이 동가식서가숙 하는 경우에는 현실이 서글프게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문중의 출가가 그저 마음먹듯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처음 봉은사에 방부 들였을 때 경흥스님은 전 소임자였었다. 사중의 분위기가 뒤숭숭하여 약간은 어색한 만남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산적같은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 텁수룩한 얼굴의 그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서울생활이 처음인 나를 이것저것 챙겨주고 조언도 해 주면서 흰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을 때 적이 당황했었다. 곧고 무뚝뚝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언어 또한 매우 직설적이어서 여간해서 쉽게 어울릴 수 없을 것이란 선입견이 작용한 탓이리라. 어쩌다 한번씩 나누는 찻잔속에서 마치 오랜 도반처럼 신뢰가 쌓여갈 무렵, “왜 사시사철 흰 누비옷만 입고 다니냐?”는 나의 물음에 “중이 누비옷 한 벌이면 되지 뭘 더 바라겠냐”며 환히 웃어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었다. 어느 밤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경흥스님 친구라는 신부님 한 분이 찾아왔다. 밤늦도록 차를 마시며 개구쟁이 마냥 장난을 치며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님과 신부님’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풍경속에서도 썩 잘 어울린다 라는 느낌을 가졌다.

원체 격이 없는 스님이었기에 인기가 좋았으며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또 멋을 아는 스님이었기에 험한 그의 입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러나 경흥스님에게는 진실로 맵고 날카로운 성품이 있다. 실없이 웃는 듯 하지만,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겨울 삭풍같은 매서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때 그 스님의 사형에게 일이 생겨 간곡한 부탁과 부름이 있었는데 결코 응하지 않고 겨울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던 날 짐 싸들고 바람처럼 떠나버렸던 적도 있다. 그 이후 사형스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철새처럼 떠돌더니 지금은 어느 선방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에게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은사나 문중의 뜻에서 벗어난다는 일은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닐거다.

모름지기 스님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자유로운 바람이어야 한다는 어느 선배스님의 말처럼 은사나 문중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감 또한 진정한 스님의 멋이 아니겠는가.

오늘처럼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면 경흥스님의 걸쭉한 입담과 차 한잔이 그리워 진다. 매서운 겨울 바람을 닮은 스님의 성품이 그리워서일까.

■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실장

200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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