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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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1)
철마다 바꿔 거는 족자


스님의 인품 보는 듯



정좌처 다반향초(靜坐處 茶半香初)


묘용시 수류화개(妙用時 水流花開)


고요한 좌선실에 차 맛은 반잔의 맛, 향기는 첫 향기


묘용을 쓰는 시간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나니.



송광사 불일암(佛日庵) 다실 벽에 걸린 족자의 한 구절이다. 붓 대롱이 닿게 꾹꾹 눌러 쓴 추사(秋史) 선생의 글씨로, 어린애 솜씨 같은 치졸한 맛이 있다. 법정스님은 철따라 족자를 바꿔 거시는데 어느 것이나 다 스님의 인품에서 풍기는 그런 아취가 느껴진다.


내가 조계산 송광사 산내 암자 불일암을 처음 참배하였을 때의 모습은 지금의 불일암 주위 모습과는 다르다. 출입하는 문과 공양간 위치가 바뀌었고 곁에 딸린 서전(西殿)을 아직 짓기 이전이었다. 광원암(廣遠庵)도 복원되기 전이었다. 25년 전인 그때는 아담하고 조촐한 작은 암자였다. 지금도 외형은 그대로인 것 같다.


찰밥을 싸들고 도반 행자들과 함께 법정(法頂) 스님께 인사차 갔다. 큰 절에서는 보름마다 하는 삭발 목욕일 날에 항상 찰밥을 한다. 송광사 찰밥 하면 또 알아준다. 그때 보현심 보살이 채공 보살로 있을 때였는데 솜씨가 아깝다 할 정도로 뛰어났다.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미역국하고 찰밥은 음식궁합으로 잘 맞아 미역국도 함께 끓인다.


국을 끓이는 소임은 내 몫이었다. 먼저 솥바닥에 기름을 바르고 물에 불린 미역을 약간 볶았다가 끓이면 담박하면서도 구수하다. 다 상(上)행자님으로부터 전수받은 요리법이다.


불일암 외에도 고개 넘어 오도암(悟道庵) 과수원에 간다. 그때 효봉(曉峰) 노스님의 속가 아드님 거사가 말년에 머물고 계셨다. 사진첩을 보여 주며 옛 이야기도 들려 주셨다.


불일암 스님의 은사는 효봉 노스님이신데 말하자면 서산 대사의 법맥인 셈이다. 그 이전 송광사는 서산 대사와 쌍벽을 이룬 부휴 대사 선수(善修)의 후손 풍암 스님의 법손이었다. 약 400년 동안을 풍암 스님 법맥이 유지되었으니 송광사는 효봉 노스님이 주석하는 시점에서 판도가 크게 바뀐 것이다. 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은 효봉 문도 일색이지만 또 언제 법력 높은 분이 새 회상을 차리게 될지 예측 불허하다. 세상사 인연 따라 오고간다.


오도암 아드님 거사로부터 전해 들은 일화가 있다. 사실 그때는 오도암이 아니고 구산(九山) 스님이 거사를 위해 과수원을 인수해 토굴로 그냥 쓰도록 하였을 뿐이니 암자랄 것도 없이 오두막 같은 토굴집이었다.


“평양 집에서는 ‘효’ 자, ‘봉’ 자 노스님이 가출한 날을 제삿날로 삼았지요. 그 날을 잡아 제상을 차려서 절을 올렸는데, 놀랍게도 노스님은 그 날 밤 꿈에, 자식들이 걸게 음식을 차려서 놓고는 절을 하더라는 거예요.”


거사님은 화순 경찰서장을 역임한 바가 있다. 헌데도 지척에 아버지를 두고도 생전에는 뵐 기회가 다시 없었다. 신혼 여행 때에는 오대산 선원 앞을 지나쳤을 때에 효봉 노스님이 이를 알아보고 앉은자리에서 돌아앉았으니 부자간의 인연치고는 묘하다.



법정스님의 차가운 눈빛은 퍽 이지적이면서도 단호하다고나 할까.


한번은 불일암에서 공양주로 지낼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광주에 호미, 돌 망치, 돌 뜨는 대꼿, 등 연장을 사러 갔다와서 잔돈을 다 내놓지 않으니, 두 세 차례나,


“연장을 잘 샀어?”


하고 넌지시 잔돈을 다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씀을 하셨다. 10만원을 가져가서 6만 몇 천 몇 백 몇 십 원을 썼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내가 끝돈은 버리고 그냥 만 원 권만 3장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잔돈을 깡그리 털어놓을 수밖에.


다른 이야기지만, 담을 허술하게 해 두면 도둑질을 가르친다고, 하여 만장도교(慢墻盜敎)란 치문(緇門)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다. 스님은 매사에 투철하여 빈틈이 없으신 줄을 짐작하였지만 정작 모시고 보니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직설적이고 단순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가 없다. 좋든지 궂든지 분명하지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스님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스님 밥그릇 안에 내가 고기 몇 점을 넣어 두었을 때였다. 스님은 몇 술을 들다말고 밥 속에 묻힌 고깃점을 보더니,


“옛날 노처녀가 있었지. 맘에 든 신랑이 없는 탓이야. 헌데 이번에는 정작 신랑감이 나타났는데 역시 결혼을 포기하고 말았다네.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지켜온 정조가 아까워서 그랬지.”


“………?”


고기를 보고는 느닷없이 노처녀 이야기를 꺼내신다. 나는 스님의 깊은 속뜻을 모르고 다만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지켜온 정조 때문이야. <계속>

200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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