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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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4)
이야기꾼으로 키워주신


엄하고도 냉정하신 스님



茶禪一味 (茶禪一味 頭印 落款 꽝 )


빛과 향기와 맛을 온전히 할지어다.


지묵 아사리를 위해


불일암 佛日 ( 佛日 落款 꽝)



어느 해 단오 무렵, 합죽선 부채에 스님이 먹물 글씨로 이런 말씀을 써서 주신 적이 있다.


스님의 낙관은 석정 스님, 무용 거사, 수안 스님, 여기에 내가 판 것까지 합해서 백여 과(顆)가 된다. 나는 초기에 20여과 정도를 파 드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찍힌 ‘불일’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불일’ 낙관의 글씨 도안은 스님이 하시고 나는 칼질만을 하였다. 스님의 미적 감각이랄까 보시는 눈은 가히 전문가의 수준을 넘는다. 새 낙관을 보여드리면,


“이건 약간 힘이 빠졌어. 다시 해와.”


“좋군. 균형이 잡혔어. 약간 옆으로 삐쳐 나와서 멋이 있지 않아?”


“날일(日) 자는 그냥 해를 그려봐. 원 안에 점만 찍고…”


나는 스님의 칭찬에 신이 나서 일에 피곤을 모르고 하였다.


불일암에서 모시고 지낼 때에 스님은 목공 일을 맡으시고 나는 석공 일을 맡았다. 일이 생기면 자기 취미에 따라 일을 하였다. 스님은 세속에서 직업을 택하였다면, ‘목수’나 ‘청소부’를 택하였을 것이라고 술회하신 바가 있다.


“내가 만약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 직업을 선택하게 됐다면, 청소차를 몰거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 일을 하게 됐을 것이다.”


목공 도구가 한 살림을 해도 좋을 만큼 많다. 이런 것 저런 것 여러 가지다. 웬만한 목수 연장을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애


살어리 랏다


멀위랑


ㄷ래랑 먹고


청산애


살어리 랏다


지금도 이 청산별곡이 새겨진 목각 현판은 불일암 부엌 입구쯤에 걸려있다. 물론 스님의 초기 솜씨이다. 서울 봉은사 시절에는 ‘다래헌(茶來軒)’, 조계산 불일암 시절 이후에는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 ‘수류산방(水流山房)’으로 거처를 나타내시는데, 낙관도 여기 이름에 따라 바뀐다.


“지묵 수좌한테는 세 가지가 안 되겠어. 낙관도 못 따라가고 수제비도 못 따라가고 이야기에도 못 따라가.


이이 야야, 차암, 지묵 수좌가 오래 이야기를 하는 데는 손을 들었어. 장장 일곱시간이야.


학교 다닐 적에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인 이후로는 처음이야, 남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오래 듣기는.”


스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한나절 하고 저녁 먹고 하고 해서 일곱시간 가까이 흘렀다. 스님이 이야기가 끝나면,


“그래? 뒷 이야기가 궁금한데…”


“재밌어. 또 해 봐.”


이렇게 추겨 주시는데 그만둘 재간이 없었다. 이야기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큰 마을 작은 마을, 이 마을 저 마을에 들어가고 천하 덮기를 계속한다. 참 신바람 나서 며칠을 해도 끝이 없어 보였을 때에 “아, 재밌다. 낼 법회로 일찍 떠나지만 않는다면… 아깝네. 자야 하니까.”


이래서 이야기가 종막을 내렸다. 진지하면서 재미있어 하시는 얼굴 표정과 모습을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나를 작은 이야기꾼으로 키워주신 이는 다른 분이 아닌 법정스님이시다. 나는 멀리 떠나 있는 시간에 아침으로는 예불 후에 절을 올린다. 여러 스승에게 차례차례 올린다. 물론 스님께도 큰 절을 올린다. 외국생활이 6년, 그동안 좌절하지 않고 매일 국내에서처럼 지낼 수 있는 힘은 곁에서 지켜봐 주신 스승이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 LA 고려사 시절. 1985년, 86년 그 무렵이었다. 운전 면허증을 필기시험 100점 만점으로 땄을 때에 스님이 “어떻게 땄어?” 하시기에 문제집을 보고 공부를 했다고 말씀을 드리고 또 몇 말씀 드렸을 때에 스님도 100점 만점 합격이셨다. 그 뒤로 차 뒷자리에 앉으시면,


“어, 속도 줄여. 좀 천천히.”


하고 말씀을 하시는데 가만히 계시질 않으신다. 엄한 운전 교사이시다. 정면 주차를 잘못해도 “차를 바로 세워. 비틀어졌지 않아?”하신다. 들을 때에는 별로 좋지 않지만 뒷날 회고해 볼 때에는 가슴 뭉클해지는 무엇이 있다. 갑자기 “회초리 매를 좀 때려주시지 않으시고…” 하는 간절한 정이 솟곤 한다. 스님의 손때가 묻은 <신채호 전집> 상 하 권을 건네주시면서,


“외국에 나가 있으면, 모국에 대한 생각을 잊지 말아요.”


하시는데 이럴 때에는 엄하고 냉정한 스님은 어디 가고 자애로우신 스승의 모습으로 붉게 각인(刻印)되어 남는다.

200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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