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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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5)
낮엔 앞산 산색에 눈 씻고


밤엔 대밭 바람에 귀 씻고



낮에는 앞산 산색(山色)에 눈을 씻는다. 꽃이 피고 녹음이 짙어지고 있다. 아, 시원해라.


밤에는 불일암 대밭을 뒤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씻는다. 때로는 우우우 처녀 귀신 울음소리, 흐흐흐 총각귀신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은 파도가 되어 밤새 철썩철썩 소리를 내기도 한다.


고요한 달밤에는 내소사 해안(海眼) 스님의 시를 읽는다.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쥐고 오는 벗이 있다면


굳이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향(香)을 사르고


산창(山窓)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불경(佛經)을 아니 배워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귀촉도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라면


굳이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고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굳이 도(道)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산야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서 온 누구인지 물을 것이 없이


굳이 오고가는 세상사를 들추지 않아도 좋다.



이 시는 절 객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스님이 윤문을 하시고 내가 이를 받아썼다. 원문을 쓴 분은 물론 금강경 해설의 삼대 법사의 한 분이신 해안 스님이시다. 금강경 해설의 삼대 법사가 어느 분이냐 하면 해안 스님, 백성욱 박사, 석해탈 스님.


처음 이 시의 원문을 접한 곳은 선운사 객실. 낯선 산사의 객실에 들면 시간이 퍽 한가해진다. 읽을거리도 없고 일거리도 없다. 그냥 밥 때 밥 먹고 잘 때면 자는 것이다. 세상 편하고 걸림이 없다.


법정스님이 이 시를 보고,


“너무 한문투야. 시를 좀 손질하는 게 어때?”


하시기에 내가 우선 소리내어 읽었다. 스님은 한 구절이 떨어질 때마다 수정을 하셨다. 윤문을 이런 식으로 하고 나서 다른 이에게 보여주니 깜짝 놀란다.


“이 시를 신문에 실어요.”


불일회보에는 당시 편집 일을 맡고 있던 현장 스님의 눈에 띄어서 실었는데 크게 호평을 받았다. 여기저기서 수 천장씩 찍어 나눠 가지며 출격(出格)장부의 풍류 시를 함께 음미하였다고나 할까.



지금은 수도를 놓고 있지만, 그때는 우물물을 썼다. 국수를 삶아서 구시통에서 씻다가 몇 가래를 입안에 넣고 쭉 빨아먹으면서,


“국수 맛은 막 씻어서 이렇게 먹는 맛이 제일이야!”


하고 스님이 시범을 보이시면 나도 따라서 국수 몇 가닥을 입안에 넣고 쭉쭉 빨아먹었다.


돗자리를 깔고 둥근 상을 펴놓고 국수를 먹는다. 저녁 식단은 대개 분식 종류. 그리고 나서 따끈한 홍차를 마신다. 커피도 마신다. 녹차는 대개 오전과 점심 때에 마신다.


공양주 초대는 노보살님, 비가 오는 밤 ‘대밭 귀신소리’에 무서워서 밤중에 스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가 꾸중만 듣고 울며 떠났고, 다음이 영명 스님, 역시 비가 오는 밤에 불일암 주위에서 음독 자살을 기도한 젊은이 한 쌍 때문에 고생고생 하였고, 그 이후 공양주가 현장 스님에 이어 산매화 보살로 내려왔다. 나는 그 다음 공양주였는데 1980년 광주 민주 항쟁이 있던 그 해 여름이었다. 사복형사가 간혹 불일암 주위를 배회하고 몸을 사리는 젊은이들도 외부의 눈길을 피해 오고 갔다. 스님은 당시 여름 이야기를 ‘한줌의 재’ 란 글에서 이렇게 쓰셨다.


“어제도 나는 부엌 바닥에 앉아 손 칼로 대를 깎아 차 수저를 만들며 하루를 보냈다.”


“어저께는 땅거미가 짙게 내릴 때까지 개울가에 흩어져 있는 돌을 주워다가 우리 불일(佛日)로 오는 가파른 길목에 층계를 놓기도 했었다. 요즘 아래 절에서 올라와 있는 지묵 수좌와 함께였다. 단순한 노동은 육신의 건강보다도 쾌적한 정신상태를 위해서 필요한 동작이다. 이 여름은 줄곧 이런 일로 고통스러운 내출혈을 다스릴 것이다.” <끝>

2000-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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