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사귄 막역한 도반
재미있는 이야기로 남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비법은 타고나는 것일까. 하여간 스님과 함께 있다보면 배꼽이 빠져서 달아날 지경이다. 승가에 몸을 담아오면서 긴 시간동안 서로 어울려 지낸 것 같다. 현장(玄藏) 스님과는 늘 그렇게 지낸 편이다.
강원 도반, <해인>지 창간 당시 편집 일, <불일회보> 편집 일 등을 함께 해오면서 대체로 손발이 잘 맞는 편이었다.
<해인(海印)>지를 창간할 당시에는 아무도 칼러로 내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야 중고등부 학생회 지도법사로 현장 스님이 나갔다가 뜻밖에 일을 저질렀다. 그때 나는 회계 일을 보고 있었는데 홀연 내 거처로 뛰어들어,
“이번에는 <해인>지가 칼러로 나와요. 경비는 한 80만원 정도 들고요.”
한다. 나는 머리가 좀 어떻게 된 사람이 아닌가 하고,
“아니? 뭐요?”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10만원 미만인 사중 보조로 학생회가 지탱해 나가는데 80만원이라니!
“다 수가 있지요.”
현장 스님이 하도 여유 만만하기에 다소 안심은 되었다.
“수는 무슨 수요?”
“아, 장경각에서 한 부에 100원씩 보급하면 돼요. 참배객들이 좋아라고 할 것이니 두고 보시요.”
의외로 간단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하루 이틀만에 품절이 되고 <해인>지는 날개가 돋힌 듯이 전국에 퍼져나갔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첫 장에는 ‘가야산의 메아리’를 싣는다. 이 원고가 들어오는 백련암에서는 원고료를 받는 대신 게재료조로 금일봉이 들어왔다. 지족암 일타 큰스님께서도 매월 게재료조로 금일봉을 하사 하셨다.
“누가 이렇게 잘 내냐?”
백련암에 원고를 받으러 올라갔을 때에 성철 큰스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칭찬해 주셨다. 큰스님의 법문이 한글로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되는 길이 <해인>지를 통해서 열렸다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때까지는 성철 큰스님의 법문이 그렇게 쉽게 한글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해인>지 뒷면은 칼러판 벽화 이야기. 해인사 벽화를 소재로 <전등록> 등에서 전거를 모아 노트 한 권에 정리한 걸 다시 쉽게 풀어서 연재하였다. 말사 주지 스님네가 내 노트를 하도 많이 복사해 가서 노트가 닳았다. 내가 처음 정리한 노트는 한문투였으나 <해인>지 편집위원으로 나 외에 홍제암의 종묵(宗默) 스님과 직지사의 흥선(興善) 스님 등이 명문장으로 시원스레 실었다. 특히 이 두 스님은 탁월한 문재(文才)가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누가 이런 명문장을 썼어요?”
독자들로부터 문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때가 불교계 최초의 칼러판 회보가 나와 관심을 모은 때였는데 밤새 원고 정리를 하고 낮에는 왜관에 있는 분도출판사를 다녀와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들과 친해진 것도 이 <해인>지 편집일 때문이었다. 그때에 대구 시내에서 고급 칼러 인쇄로 분도출판사를 따라가는 데가 없었다.
매달 <해인>지 발송작업 때문에 강원 울력이 있었다. 스님들이 하나같이 좋아해서 신바람이 일었다. 그 때 큰방 가운데에 잉크냄새가 나는 <해인>지를 산더미같이 풀어놓고 <해인>지의 반을 꼭꼭 접어 띠를 두르고 풀을 붙이는 발송작업에 동참했던 도반들은 지금 다 어디 있을까.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지금은 내가 있는 송광사와 현장스님이 계시는 대원사가 지척간에 있어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차를 마시러 다니는 편이다. 오래 사귄 도반은 장 단점조차 잊는 것일까. 누가 단점을 말해도 흥흥, 장점을 말해도 흥흥 그렇다는 생각이 들 뿐이지 별다른 감상이 일지 않는다.
현장스님이 길상사 주지를 단 하루 한 일에 대해 말해야 겠다.
성북동 골짜기에 길상사가 들어서서 현장 스님이 주지로 추대되었을 때였다. 그때 현장 스님은 회주 법정 스님의 부탁에 못 이겨 주지 승낙을 하였으나 하루를 지나 곧 사임하고 말았다.
창건주 김영한 보살 역시 의아해서,
“스님들은 밥상을 잘 차려 올려도 수저를 잡지 못해요.” 하고 평하였다.
대원사에 가서 현장 스님과 같이 앉아서 주지 사임한 내력을 듣는 자리에서였다.
“현장 일일 체험”
앞 뒤 없이 이렇게 말해서 나도 따라 크게 웃고 말았다. TV 프로에서 인기 연예인의 ‘현장 일일 체험’이 인기를 모으고 있는 모양인데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불착(不着) 현장 불리(不離) 현장’
현장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장을 떠나지도 않는다. 현장 스님은 사실 그렇게 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