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부터 2개월간 ‘스님이야기’를 연재할 허주스님<사진>은 지난 74년 팔공산 파계사에서 출가, 78년 통도사 승가대학, 81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했다. 97년 조계종 교육원 교육국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 봉은사 포교실장으로 있다.
법현 스님
난폭함에서 해맑은 모습으로
‘수행이란 저런 것이구나’
법현스님은 동안(童顔)이다. 아주 맑은 얼굴이다. 그리고 승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수행자다. 그는 입산할 때 모습 그대로 30년 가까이 좌복위에서 정진일여(精進一如)한 수도승(修道僧)이고 나는 도시 한복판에서 고단하게 시주밥만 축내고 있는 수도승(首都僧)이다.
사람이 한 생애를 살아감에 있어서 숱한 인연을 만나게 되지만 혈연, 지연, 학연을 떠나서 그와는 법연(法緣)으로 만났다. 법연은 부처님 법에 귀의한 인연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살갑게 아주 가까운 것도 아니요 또 먼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얼굴 잊어버릴만 하면 한 번씩 만나서 몇 마디 안부 정도 묻는, 나에게는 사형뻘 되는 스님이다.
어릴적 생각을 하면 빛 바랜 필름들이 가슴 한 귀퉁이에서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출가당시 그는 매우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어서 난폭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내 또래의 행자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했다. 어린 탓도 있었지만 당시의 기억으로는 정말 가까이 하기 싫은 두려운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한 번은 그의 손바닥과 정권에 생긴 굳은 살을 보면서 주눅이 들었던 기분이 마악 가시기도 전에 장난기가 유별난 행자 한 명이 그에게 무차별 난타를 당했던 일이 있었다.
예전에 절집 후원 뒤뜰에서는 하심(下心)을 시험하기 위한(?) 규율잡기 차원의 겨루기가 종종 있었다. 그 과정을 참지 못하고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 끝내는 하산의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던 사람들도 있다.
놋쇠로 만들어진 촛대에 녹아있는 촛농과 녹을 깨끗이 닦아 놓으라는(당시에는 광택제가 흔치 않아 아궁이의 재를 이용해 닦았다) 노스님의 지시를 어린 행자들이 노는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닦아 놓질 못했다. 아뿔사, 노스님의 불호령이 고참인 그에게로 떨어졌다. 촛대 닦는 일은 어린 행자들의 몫이었는데 엉뚱하게도 그 날은 꾸지람이 그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스님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일순간 한 행자를 향해서 번개같은 발차기와 현란한 주먹질이 쏟아졌고, 그것도 부족해서 촛대까지 함께 움직였다. 도저히 함께 저항해 볼 수도 없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분위기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요즘 십대 학생들을 보면 밝고 활기차 보이는데 당시 또래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 밤마다 악몽을 꾸었던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저 해맑고 귀여워서 도저히 손찌검은 상상도 못해 볼 일이건만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규율잡기 행사가 당시에는 일상사였다. 나이 차가 한 두 살 터울인 같은 또래의 행자들이 서 너명 있었으니 개구쟁이 짓은 으례히 뒤따르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을 엄히 다스리는 차원에서 감정이 지나치게 앞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길 없는, 그 당시 상황의 주인공이 바로 법현 사형이었다.
그러던 그가 암자 생활을 정리하고 물고기는 큰 물에서 살아야 한다며 해인사로 떠났다. 그후 줄곧 지금까지 40안거 정도는 되고도 남는 선원생활을 하고 있다. 공포로만 기억되던 그가 참된 수행자의 모습으로,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한번은 개운사에 있을 때 삼성암에서 나한기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거가 끝난 해제철이면 어김없이 전국 유명 기도처를 찾아서 기도를 하는 그를 두고 일부 수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그의 정진이 간단(間斷)을 허용치 않는 것처럼 기도 또한 그에게선 게을리 할 수 없는 수행일과였다.
그런데 삼경(三更)이 지나서까지 목탁소리를 낸다고 그 곳 주지스님 상좌하고 시비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해들은 바로는 상좌는 젊은 사미였다고 하는데, 법현 스님이 일방적인 폭언과 구타까지 당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법현이었는데, 바다라도 한 입에 삼켜버릴듯한 당당한 청안납자(靑眼衲子) 아니었던가. ‘어떻게 그런 고초를 겪을 수 있었나.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동명이인이겠지’ 하고 무심히 지나치려 했으나 사건의 주인공은 틀림없는 법현이었다.
통화할 기회가 되어서 본인보다도 내가 더 분한 마음에 폭행 부분에 대해서 단단히 짚고 넘어가자고 흥분해서 말했다. 사미가 비구를 구타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다. 대중처소 같으면 이불 공양 후 옷을 벗기고 산문출송을 당할 일이었다.
법현은 체념이 아닌 아주 편안하고 지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다시 시끄럽게 하지 말자고 간곡히 부탁하는게 아닌가. 그 사미도 마음이 편치는 않을 거라면서….
이 양반이 공부가 지나쳐 이렇게 심약해졌나 안타까운 마음이었으나 한편으로 그의 말속에서 진심으로 사미를 용서하고 걱정하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전해왔다. 그저 있을 수 있는 시비로만 비쳐질 수도 있으나 내가 보아왔던 법현의 모습이 너무도 다르게 변해 있었으니 그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무능한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으름뱅이도 아니요, 겁쟁이는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니 감화(感化)라고 해야 옳은 표현같다. 그것은 하나의 청복(淸福)이다. 감동이 없는 삶은 무의미한 것, 수행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경건한 일깨움은 그나마 큰 위안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