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발심 그대로의 모습
아픈 무릎 좋아졌는지
요즘같이 자기 주장이 강해지는 시대에 살면 절집도 시류와 무관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보루가 있다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수행자의 모습 아닐까.
중생은 욕망으로 살고 보살은 원력으로 사는 것이라는데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며 사는 우리네 인생은 변화무쌍할 수밖에 없다. 하늘 한 번 제대로 쳐다 볼 여유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은 늘 피곤하고 고단하다. 그 피곤하고 고단한 삶이 추구하는 것이 돈 쓰고 돈 버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니 말이다. 그것이 세상사 이치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도시에 사는 나 자신도 바쁘게 사는 것 같은데 저녁이면 왠지 허탈한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래도 산에 있을 때는 하루 세끼 밥만 축내는 밥벌레 같은 생각이 들어도 하루하루가 넉넉한 느낌이었는데….
수행자의 삶은 원력의 삶이다. 원력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도 아니요, 이타적인 표어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깊은 강줄기와 같이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흐름을 유지하는 것,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도도한 흐름을 깨지 않는 그것이 원력이 아닐까.
수행이란 글자 그대로 행실을 바로 닦는 것인데, 외침과 구호는 많은데 보여지는 행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법현스님에게선 구도자의 날카로운 예지는 보이지 않으나 마음이 푹 쉬어서 산골 중 냄새가 푹푹 난다. 그저 결제가 되면 안거에 들어가 정진하고 해제가 되면 제방 기도처를 찾는다. 추운 겨울이건 요즘 같은 찜통 더위건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와 정진을 쉬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디 주지 소임을 살았다던가 암자 원주자리 한 번 살아본 적이 없다. 꼭 이타적인 회향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묵묵히 자기 수행에 열심인 사람을 소승이라, 이기적이라 매도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지난해 늦게 발심을 해서 하안거에 들어갔었다. 뒷날 가까운 사형에게 들으니 법현스님이 나를 많이 찾았다고 한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왔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사판(事判)으로 끝날 것 같던 놈이 그래도 여근(餘根)이 있어서 선방 문고리라도 잡은 것이 안심이 되어서 그런지 25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는데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이도 부끄러웠다. 그의 얼굴을 보면 바위라도 깨고 그 속에 숨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중은 좌복 위에 앉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사판은 중으로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그저 먹물 옷의 무게를 견뎌내며 오매불망 참구(參究)에만 힘쓸 때 그게 출가인의 참모습이라고. 그 참모습이 독각(獨覺)이라 매도되더라도 좌복 위에서 일생을 회향할 수 있다면 중노릇 잘하고 간 거라고….
또 누군가 말했다. 곧게 뻗은 나무는 쓸만한 목재로 잘려나가고 산을 지키는 것은 온통 잡목뿐이듯이, 중노릇 좀 할 만하다 생각되는 이들은 죄다 기어나간다고. 비약된 표현인지는 몰라도 얼굴 반반하고 영리하게 생긴 외모로는 한 생각 접고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리라.
헌데 법현스님은 초발심 그대로의 모습이다. 적어도 먼발치서 바라보는 나에게는 그렇다. ‘벼룩 세 말은 몰고 갈 수 있어도 혈연 끊고 입산한 중 하나는 못 몰고 간다’는 어느 노스님의 말씀처럼 법현스님은 그야말로 중고집으로 늘 자기검열에 시달리면서 행각(行脚)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법현스님이 작년 산행을 하다 무릎 연골을 다쳐 심한 고생을 하였는데 그나마 정진하던 선원에서 퇴방 조치를 당했다. 그는 돈이 없다. 어디 소임 한 번 살아본 적이 없기에 소액의 돈도 없다. 그런데 돈이 없으면 불편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다. 반평생 넘게 면벽으로 일관했던 그이가 돈의 기능을 인정한 것이다. 급한 치료 때문이었겠지만 세속의 인간관계에서만 돈이 위력적인 게 아니라 절집도 예외가 아닌 상황을 그가 늦게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스님에게서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작은 토굴이라도 있었으면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 아팠다.
손바닥에 쥔 모래알 같이 그의 가슴속에서 무엇이 빠져나갔는지는 몰라도 그 꼿꼿한 허리며 나이에 걸맞지 않은 해맑은 얼굴이 오래 기억됐으면 좋겠다.
엊그제 전화가 왔다.
“한 철만 살고 말 거야? 기왕에 발을 디뎠으면 계속해서 몇 철은 더 견뎌야지.”
나에 대한 실망을 이렇게 표현한 전화 음성에 봄 햇살 같은 따스함이 전해진다.
법납 30년 세속 나이 50이 되어서 평생 면벽만 했던 과보로 건강이 안좋은 모양이다. 치아도 많이 상했다고 한다.
암자 살림하는 사제 스님에게 상한 이빨을 보여주며 어렵게 치료비를 부탁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작금의 현실이 너무 슬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