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고단한 삶 살아온
할아버지뻘 늦깎이 사제
나에게는 할아버지뻘 되는 사제(師弟)스님이 한 분 있었다. 지난주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으로 전국이 눈물바다가 되었을때 그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의 사제스님이 떠올라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졌다. 그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허연(虛然)스님, 아마 살아 계시면 세수는 95세 법납은 20년 조금 넘는 것으로 기억된다. 고향은 평안도라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고 1.4 후퇴 당시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38선 때문에 남은 세월 망향의 한을 품고 고단한 삶을 살다가신 분이다.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부처님 법을 만나 늦게 출가하여 사제가 된 노스님인데 어찌됐건 손자뻘 되는 주변스님들에게 항상 깍듯이 사형의 예를 갖추곤 했었다.
은사스님께서 인척도 없이 오갈데 없는 노인이니 그래도 부처님 품에서 거두면 밥은 굶지 않을 거라면서 소개를 시켜 주셨다. 잘 돌봐드리라는 당부의 말씀을 곁들이면서.
비슷한 연배의 사형사제들은 뜻밖의 할아버지 사제를 두게 되자 잠시 술렁거림 속에서도 은사스님께 어찌 나이 많은 스님을 상좌로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지만 은사스님께서는 끼니걱정하는 노인을 밖으로 내칠 수 없다 하시면서 어린 우리들에게 자비심으로 동의를 구했다.
한 번은 운문사 대비암에서 보살계 산림법회를 할 때인데 허연스님의 나이가 율사스님들보다도 더 많으니까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당시 강원의 학인스님들이 대중방에 인사하러 와서 계단(戒壇)의 율사스님들을 외면하고 당시에는 행자였던 그 앞에 와서 삼배를 올린 것이다.
사미계를 수지하러 왔던 그가 절집 정서를 알지 못해 당황하는 기색에 얼굴까지 창백해지고 있었는데 장난기가 있던 사형스님이 그대로 절을 받으라고 옆구리에 신호를 보냈다. 어정쩡한 자세로 절을 받는 모습이란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계사스님이셨던 일우(一愚), 종수(宗秀)스님께서 저 스님은 누군고 라고 물었을 때, 은사스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자비문중이란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곳이 부처님 도량이라고.
늦게 출가해서 그것도 칠순이 넘어 절집 생활을 하다 보니까 세속에서 익혀왔던 습관들을 쉽게 털어 낼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에서 손자, 아들 뻘 되는 스님들에게서 ‘중속한이’라는 마음 아픈 소리도 듣곤 했지만, 워낙 타고난 넉살이 있었기에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이 70 넘은 노스님들은 계(戒)의 구속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일부 전언(傳言)에 의해서 때로는 곡차도 몰래 사다드렸고 육질과 궐련도 은사스님 몰래 갖다 드리기도 했었다.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아온 늦깎이 사제에게 모두들 수행자로서의 냉정함 보다는 자식같고 혈육같은 인간적인 정을 앞세우곤 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스님들보다 사형되는 스님들에게 더욱 더 가족같은 친근감을 표시했다. 때로는 친근함이 지나쳐 출가인이라는 본분을 벗어나 연로한 노인 특유의 투정아닌 투정을 부릴 때도 있었는데 그럴때면 스님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늦깎이는 할 수 없어”라는 말로 이곳은 엄연한 부처님 도량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래도 젊어서 만주에서 보냈던 시절을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면 신명이 나서 예뻤던 기생 이야기며 일본사람들 이야기를 곧잘 해주곤 하였는데 도중에 눈가에 고인 눈물을 애써 감추려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내 긴 한숨으로 이야기를 끝내고는 “곡차 없습니까”를 연발하곤 하였다.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상기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엔 즐거움이면서도 나중에는 형언키 어려운 아픔으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붉어진 눈시울을 통해서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기골이 워낙 장대하고 젊은 사람 못지 않게 힘이 세었는데 발을 헛디뎌 허리를 다치고 나서는 급격히 시력도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주위 스님들 손길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짜증이 늘기 시작하더니 정을 뗄려고 작정을 했는지 막무가내일 때도 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중은 아플 때 가장 외롭고 힘들다. 그 누구하나 일별도 주는 이가 없을 때 더욱 그렇다. 혼자 끙끙 앓다가 일어나야만 한다. 병상의 문을 두드리면 “아이고 죽갔시오”, “일 없시요”를 수없이 되뇌이며 긴긴 겨울 밤을 지새웠던 그를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왔었다. 사형 한 분이 그 곁에 있었지만 뒷날 소식에 의하면 허리가 웬만해지자 정처없이 떠났다고 한다.
“무슨 노인네가 가사 걸치고도 염불 한 번 하는 것을 못보니 절에 와서도 박복한 짓만 한다”고 쌀쌀맞게 쏘아대던 내 모습이 한없이 야속하다. 몇 년을 한솥밥 먹으며 살아 왔는데 떠나올 때 그야말로 절연(絶緣)하듯 떠나왔으니 ‘인간 못된 것 중된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어릴 때부터 정이 많으면 중노릇 못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기에 얼굴은 애써 평상시 표정인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은 어쩔 수 없다.
“89년도인가 영천 성모병원에서 김익현 노인이 누구냐고 연락이 왔길래 가보니까 이미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화장을 한 후야. 그래서 제사만 지내줬어.” 지리산에 있는 사형에게 연락을 해보니 허연스님은 10여년 전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