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인시절 흔들림없는 수행
자나깨나 손에는 경구쪽지
열반하신 큰스님들의 다비장에 참석해 보면 예전에 함께 생활했던 도반 내지는 선후배 스님들을 만날 때가 간혹 있다. 평소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얼굴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 반가움의 표현이 “요새 어디 계십니까.” “많이 변했네요. 건강하십니까”라고 한다면 그저 눈인사 정도로 지내던 스님들이고, “아직도 중노릇하고 있냐” “야, 중노릇 지겹지도 않니. 왜 여태 붙어 있어”하면 마음속에 늘 그리며 살던 도반이다.
한눈 팔지 않고 절집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 너무 고맙고 반가워서 하는 표현이지 너같은 사람이 왜 아직도 먹물옷 입고 있냐 하는 비아냥은 절대 아니다. 그래도 처음 수계를 마치고 바로 대중 생활을 했던 강당(講堂 : 지금의 지방 승가대학)에서의 추억이 제일 그리운게 사실이다.
통도사 감로당 학인시절, 중노릇에 대한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던 그때. 몇몇 도반스님들과 의기투합해서 “죽을 때까지 중노릇 잘하자. 변치 말고 이 한몸 생사일대사인연(生死一大事因緣)을 해결하는데 던져버리자” 라는 객기와 각오와 결의로 뜻도 모르는 난해한 어록을 무조건 외우고 또 외웠던 어린시절, 무슨 잠이 그리 쏟아졌던지 화장실에까지 가서 앉아 꾸벅꾸벅 졸던 생각을 해본다.
수면존자(睡眠尊者)로 일컬어졌던 정현스님, 제법 큰 키에 경상도 사내답지 않은 느린 말투, 호리한 체격임에도 동작은 왜 그리 느리던지. 함께 일할 때면 속이 답답해 가슴을 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별칭이 ‘느림보 수면존자’. 눈만 뜨면 오로지 치문, 경구를 외우는 일 외에 그 어디에도 시선을 돌린 적이 없었다. 3년 내내 한번 앉으면 정가부좌 자세 그대로 죽비소리가 날 때까지 시종일관했고 무엇보다 미련하게만 보였던 그 모습에 대중들은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 왜냐하면 미련해야 중노릇 할 수 있지, 약아빠진 근기로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지론이었다. 당시 내 생각으로 정현스님은 왜 저렇게 머리가 아둔할까. 그까짓 경구 몇 장 외우는 일에 하루 시간을 다 소비하다니 도대체 지능이 얼마나 되는 걸까 하고 업신여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스님의 소임이 갱두(羹頭: 국을 끓이는 소임)였는데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중얼중얼, 포행할 때도 웅얼웅얼, 그야말로 자나깨나 경구가 적힌 쪽지를 손에서 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무사태평, 시간만 나면 잡지 또는 시, 소설 따위만 읽었고, 경전은 뒷전이었다. 새벽 예불 후 2시간 정도면 정현스님이 암기한 양의 경구를 충분히 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있었다. 강의시간에 강주스님 앞에서 외울 때는 곧잘 외워졌는데 삼일 정도 지나면 외웠던 문장들이 하나도 기억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많이도 당황스럽게 했었다. 헌데 정현스님은 달랐다. 삼일이 아니라 삼 년이 지난 후에도 치문 전체를 줄줄이 외우는 것이었다. 그때의 좌절과 부끄러움이란 지금도 내게 공부는 미련스럽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항상 환희심에 젖어 있던 그의 얼굴에 수심이 깊게 드리워졌었는데, 한동안 책을 덮고 좌선삼매에 빠진 듯 했다. 그러나 편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올 것이 왔다는 소문이 다름아닌 병역문제. 스스로는 현재의 이 상태에서 계속 부처님 공부만 하고 싶지 일체 다른 상황은 거부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못하면 영영 못할 것 같다는 단서를 붙여가면서... 어떻게 자신이 총을 들고 그것을 겨눌 수 있겠는가 하고 신음하듯 말하곤 했다. 그래도 주위의 많은 스님들은 사내라면 군대생활은 필수이고 미필자는 사내 취급도 안한다는 사회 통념을 주지시켰지만 그는 오히려 중노릇하는데 득될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공양시간에 보면 소식(小食)을 했었는데 그나마 밥의 양을 줄이더니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신체검사 일주일을 앞두고 관음전에서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다들 걱정을 했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마침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 체념의 눈빛에 알 수 없는 힘이 있어 보였다.
사흘이 지났을까. 소식이 왔는데 신체검사에서 X레이 촬영을 하는데 폐에 구멍이 많이 보여서 면제를 받았다고 했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데 촬영결과는 입영불가로 판정되었다 한다. 그렇게 가기 싫어했던 병역문제가 해결되자 그의 기도 가피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풍취불입 수쇄불착(風吹不入 水麗不着)의 일념에서였을까. 아무튼 그의 간절함이 제도권을 초월하게 하였는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그는 부처님 밥을 먹고산다.
몇 년 전 성철 큰스님 다비식 때 해인사에서 만났다. 나이살이 쪄서인지 깡마른 체구가 거구가 되어 있었다.
“정현스님, 아직도 중노릇하고 있네” 하고 반갑게 맞자 그 곳 선원에서 한철 잘 지냈다 한다. 지금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다음에 어느 회상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밥값은 하고 사는겨?”라고 반갑게 반문할 것 같다.
*고 침
지난호(285호) ‘지묵스님의 스님이야기’를 ‘허주스님의 스님이야기’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