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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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 노스님
공부 게으른 학인들엔
공포의 심우장 목침할배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은 선택된 이미지다. 어떤 것은 잊혀지고 어떤 것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간혹 떠오를 때가 있는 반면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괜히 콧등이 시큰거리는 일들도 있다. 기뻤던 일들도 슬펐던 일들도 그러나 망각 속에, 세월 속에 묻히면 추억일 뿐이다. 해서 인간은 망각이라는 기능이 있기에 산다. 인간에게 잃어버리는 잊어버리는 기능이 없다면 어떨까. 아마 우리 내면은 칠흑같은 어둠보다도 더 깊은 어둠에 휩싸여 한 번의 슬픔에서 영원히 헤어나지를 못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망각이라는 편리하고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기능이 있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늘 잊고 살다가 어떤 계기가 있어서 간혹 오랜 기억을 유추해 볼 때가 있다. 이것은 어떤 이미지이기보다는 간절한 그리움이라 생각된다.

요즘 우리 절집에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잔소리하는 사람 없고, 잔소리 들을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승가 특유의 가풍이 경책(警策)과 탁마(琢磨)인데, 요즘은 눈치껏 적당히 알아서 모든 것이 자율적인 분위기로 변한 것 같아 옛 스님들의 체취가 그리울 뿐이다. 그래서 더욱 생각나는 노스님 한 분이 있다. 70년대 중반 통도사에는 경봉(鏡峰), 벽안(碧眼), 일암 큰스님을 비롯해 많은 노스님들이 계셨다. 그 중에서 경하(鏡河)노스님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질 않는다.

경하스님은 몸의 반은 전혀 쓸 수 없는 불편한 몸으로 심우장(尋牛壯)을 지키고 계셨다. 뒷방에 계시면서도 그 많은 학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셨고 풍기 때문에 문밖 출입은 자주 안하셨지만 누구보다 사중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알고 계셨다.

누구는 학인 신분으로 공부시간에 계곡에 가서 멱감고 왔다, 어느 학인은 쓸데없이 산문출입이 잦다더라 하면 여지없이 불려가 몇 시간이고 무릎꿇고 앉아 훈시를 듣고 더불어 목침을 맞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늘 베고 계시던 목침을 던져 일갈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학인들 사이에 “공포의 노스님 목침할배”라는 별칭이 붙었다.

어느날 내게도 잠깐 들르라는 시자스님의 전갈이 왔다. 일단 한번 불려 가면 누구를 막론하고 목침 세례를 피할 수 없었던 터라 갑자기 맥이 풀리고 가슴이 뛰었다. 무엇을 잘못했을까. 시자를 하고 있던 영한스님을 놀려대서 노스님이 화가 나서 부른 것일까, 아니면 며칠 전 시내에 나가서 영화본다고 귀사 시간을 어긴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걸까. 별별 생각을 하면서 심우장 문을 두드렸다.

불편하신 몸인데도 불구하고 가부좌에 허리 또한 꼿꼿이 세우시고는 “네가 성우 상좌 맞냐?” 하신다. 그렇다고 하자 “네 은사가 여기서 공부할 때 연비까지 했다. 그만큼 독하게 공부했는데 요새 왜 경반 학인들 글읽는 소리가 시원찮으냐. 그리고 니 글 읽는 소리는 전혀 안들리는데 어찌된 일이냐. 궁금해서 불렀다. 어디 아픈게냐?”라고 자상하게 물으시는 것이었다.

내 눈은 스님의 오른 손과 그에 근접해있는 목침(木枕)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언제 내게로 날아올지 몰라 내내 긴장을 접지 않고 있는 터였다. 불려가는 학인들은 먼저 목침경험을 하고 온 스님들에게 조언을 듣곤 했었는데 절대로 날아오는 목침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피하면 스님을 노하게 하는 것이어서 온전히 그 방을 나올 수가 없다했다. 그래도 내심 여차하면 피할 각오로 내 눈은 스님의 손과 목침에 머물렀지만 스님께서는 할아버지같은 모습으로 내 건강을 물으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접시에 놓여있던 빨간 홍시를 내 앞으로 밀어 놓으시는 게 아닌가. 몸이 불편했었다는 구차한 변명이 끝나자 이내 웃는 얼굴로 할아버지와 손주 사이 같이 “지붕이 성글면 비가 새듯이 마음을 잘 추스리지 못하면, 병마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라 하신다. 부처님 법 만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인연인데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씀을 끝으로 양말 두켤레와 홍시를 손에 쥐어주시고는 심우장 문밖을 허락하셨다.

물론 나이가 어려 귀엽게 봐준 덕분이었지만 목침세례를 무사히 넘겼던 것이 당시 상황에서는 이례적이었었다.

경반 학인의 처소인 황화각(皇華閣)과 심우장의 거리는 오십여 미터쯤 되는데 그 거리에서 독경소리를 구분한다는 것은 지금 나의 싱싱한 청각으로도 자신이 없다. 헌데 스님께서는 낱낱이 청규(淸規)를 점검하고 계셨다. 이렇듯 뒷방에 계시면서 투병중임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의 정진을 자극했던 것은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라 확신한다. 경봉 노스님께서도 큰절에 내려오시면 자주 심우장을 찾아 병상의 스님을 위로하고 가셨다.

예전의 큰스님들은 법력으로 후학들을 경책하셨는데, 그 법력 앞에는 그 어떤 논리도 주장도 소견도 삿되게 작용되는 것은 한치도 용납이 안되었다. 어른이 없다는 말보다는 어른을 어른으로 생각하지 않는 요즘 풍토에 잔잔히 옛기억들을 더듬어 보았을 뿐이다.

■봉은사 포교실장
200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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