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스님 법맥 이어받아
한평생 禪林에 계신다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내원(內院)에 주석하고 계시는 고송(古松)노스님은 내 마음속의 영원한 선지식이다. 스님은 봉은사에서 당시(1925년경) 조실로 계셨던 방한암(方漢岩) 큰스님을 만나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아 세수가 95세(법납 78세)인 지금까지 한평생 선림(禪林)에 계신다.
한암스님은 봉은사 다래헌(현재의 봉은선원)에서 몇 철 안거를 보낸 후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하시고는 홀연히 상원사 중대암으로 들어가셔서 단 한번도 산문 출입을 하지 않고 오대산에서 입적하셨다. 봉은사에서의 인연으로 한암스님의 법제자가 된 스님은 내가 다래헌에서 조실이신 석주노스님을 모실 적에 가끔 들르셔서 한암스님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곤 하였다. 조실스님과 함께 금강산 마하연에서 함께 정진하시던 말씀을 나눌 때 두분이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몇 년전 병상에 계신 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척추를 다쳐 줄곧 침대에 엎드려 계셨다.
“눕지도 못하시고 많이 힘드시죠”라고 문안 드리니 첫 말씀이, “병원에 있으니 왜 이리 시간이 잘가노” 하신다.
나도 척추를 다쳐 며칠 병상에 누워 있어보니 그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던지 평소에 며칠이고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다는 꿈은 하루만에 깨어졌었다. 이틀째가 되자 왜 그리 시간이 지루하고 힘이 드는지 등짝이 배기고 몸이 꼬여 입원기간의 절반을 앞당겨 퇴원했던 적이 있다. 90이 넘은 노구에 그것도 누워있는 시간보다 엎드려 있어야 하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하시는 말씀이, “시간이 너무 잘 간다. 금새 아침이고 저녁이니 큰일났다”라니, 내 속을 꿰뚫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스님의 느낌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었다.
병원에 누워 있어보니 지루해서 혼났다고 말씀드리자 “이놈아, 지루할 시간이 어디있어” 하신다. 담당의사가 하는 말이 골절상인데도 회복속도가 젊은 사람보다 빠르다고 했다. 노구에는 뼈에 아교질이 없어 잘 붙지 않는데 스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간혹 스님을 모시고 장거리 운전을 할 때면 차안에서 한번도 조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눈은 항상 창 밖을 응시하고 계셨다. 옆자리에서 누가 조는 모습을 보이면 “이 좋은 시간에 졸기는 왜 졸아. 젊을 때 부지런히 봐야지, 좋은 때에 열심히 공부 안하면 시간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강산(江山)을 많이 부지런히 봐야 심안(心眼)이 열리는 법이다” 하시면서 깨우곤 하셨다.
스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묘한 향기가 난다. 그저 무심히 하시는 말씀인데도 활구(活句)가 되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아는 데서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이 중 공부다. 중이 너무 아는게 많으면 못쓴다. 제 얼굴도 모르면서 안다고 하면 누가 믿나.”
젊은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몸에 신경을 쓰면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스님은 좋은 음식보다는 부지런히 움직임으로서 건강을 유지하신다. 그런 모습에서 스님의 철저한 수행생활을 엿볼 수 있다. 노인이 너무 몸에 연연하는 모습처럼 보일지 모르나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치를 보여 주시기라도 하듯 아침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거르는 법이 없다. 환화공신(幻化空身)이 법신이라 했던가. 이 몸뚱이가 비록 현재는 고통 덩어리이고 번뇌 덩어리이지만 또한 이 몸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저 중국의 영가스님 말씀처럼 젊은 사람보다도 더 부지런히 철저히 운동을 하시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탄허스님께서 지병으로 입원해 계실 때 병문안을 가셔서 누워 계신 스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이 사람아 부처 되겠다고 온 사람이 여기 이렇게 누워있으려고 절에 왔나, 어서 일어나서 부처 찾아야제.” 하시면서 많이도 안타까워 하셨다.
예전에 함께 했던 주변 노스님들의 입적 소식을 들으면 거침없는 활구를 쏟아놓으시고는 이내 쓸쓸한 어깨를 추스리신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정보화시대에 있어서 불교도 앞으로 많이 변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자,
“그래 요즘 사람들 다 석사고 박사야. 모두 똑똑해. 이 늙은이가 말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하네 하겠지만 그러나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때 먹던 밥을 지금도 그대로 먹고 있다는 거야. 저 계곡 물 흘러가는 소리는 변하지 않았어, 우리 본래자성은 불변인 게야.” 하신다. 딴데 신경쓰지말고 먼저 자신을 위한 공부먼저 마치고 남을 이야기하고 변화를 설명하라 하신다. 생전에 계실 때 사진이라도 제대로 남겨 놓으려고 간혹 카메라를 불쑥 스님 앞에서 꺼낼 때가 있다. 그럴때면 이 늙은이 뭘 찍을게 있냐고 하시면서 남의 얼굴찍지 말고 네 얼굴이나 올바로 찍으라고 하신다. 손주 상좌놈 하는 짓이 늘 철없는 짓으로만 보이는가 보다.
■봉은사 포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