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많고 말보다 행동으로
승가대 꽃꽂이동아리 주도
사찰이든 가정집이든 그 집 안 주인의 안목과 분위기에 따라 가구의 배치, 소품의 배치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텅 빈 방안에 경상(經床)과 가사 한 벌이 걸려 있는 공간도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운치지만 오밀 조밀 찾는 사람의 눈길을 순간 순간 포착할 수 있는 운치가 있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정안스님이 사는 도량이 그러하다. 고전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그런 도량이다. 만약에 정안스님이 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실내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번은 백양사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3년동안 두문불출 지장기도를 하고 있다는 정안 스님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스님은 사분 정근을 하면서, 기도 틈틈이 붓글씨를 써서 암자를 찾는 신도들에게 나누어주며 포교를 하고 있었다. 일단 그곳을 참배 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스님의 원력에 따라 빛깔고운 낙엽을 모아 코팅을 하여 책갈피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았고, 경전말씀을 코팅하여 누구라도 가져 갈 수 있게끔 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날 무렵 또 찾아갔을 때는 관공서를 찾아 다니면서 문화재 보수비를 얻어내어 전통도량에 어긋나지도 않으면서 정안스님의 성격과 분위기에 걸맞는 아주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을 보았다. 신도도 없는 산중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나의 말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부처님이 만들어 주신 일이고 나는 그저 심부름을 한 것뿐인데 뭘... 나는 그래도 전통사찰인 본사 옆에 있기 때문에 문화재 보수비라도 타서 불사할 엄두를 내지만 정운 스님이야 말로 불모지인 그곳에서 포교하는 일이 대단해요.”
스님과 나는 승가대학 동창이지만 정안스님은 운문사 강원의 대 선배이기도 하다. 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스님과는 달리 기숙사 한방에서 오래 같이 생활을 했고 또 함께 소임을 살았다. 당시 승가대학 비구니기숙사의 살림은 턱없이 가난했고 학생소임자가 살림을 운영해야만 했다. 정안스님은 기숙사 원주소임, 나는 비구니회장 소임으로 얼마간 함께 살림을 꾸려 나갔는데 어느날 기숙사에 작은 재 하나가 들어왔다. 돈의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둘은 얼마나 기뻤는지모른다. 작은 돈이지만 이 돈으로 스님들에게 오랜만에 별식을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재물(齋物)도 마련하고 공양거리도 마련할 겸 함께 시장에 나갔다. 원주소임으로서는 당연히 재물을 먼저 사고 대중공양거리를 사야 하는데 정안스님은 대중들에게 뭘 좀 먹여 볼까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에 재물 살 돈까지 몽땅 공양거리로 장만하여 돌아와 대중들에게 포식을 시켰다. 그리고 나서는 재물 마련할 돈이 없어 여기저기 탁발을 하여 재를 지내 준 적이 있다. 그날 대중들은 정안스님의 이런 마음을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고 오래간만에 그냥 포식을 했다.
지금 승가대학 비구니스님들에게 주어진 꽃꽂이 수업도 정안스님이 만들어 낸 원력의 산품이다. 스님은 운동도 좋아하고 노래도 잘하는 등 다양한 재주와 취미를 가지고 있다. 서울에서 문화의 혜택이 주어졌을 때 뭔가 배워서 졸업후 그 뜻을 펴 보겠다는 스님의 원력에 따라 틈틈이 꽃꽂이를 배우다 보니 꽃꽂이가 불교에서 발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또 일본에서는 최고의 꽃꽂이 사범이 스님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꽃꽂이 동아리를 만들어 스님들에게 보급해 각 사찰에 돌아가서 정성어린 손길로 창작을 해 부처님 전에 꽃을 올린다면 사찰을 찾는 신도들에게도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는 길이 아니냐는 정안스님의 제안이 좋아 학교에 건의하여 그때부터 ‘향원’이라는 꽃꽂이동아리가 결성되었다. 학교축제 때는 작품전까지 열었다. 정안스님은 꽃꽂이 사범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아서 활동을 하지 않는다. 스님은 재주가 많지만 거기에 빠져 안주하지 않는 것이 정안스님만이 가지는 장점인지도 모른다. 학교 졸업후 은사스님이 계시는 본사로 돌아 갈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도 땅으로 내려가 허물어져 가는 암자를 몇년동안 힘겹게 복원했다. 이제 좀 편하게 지내는가 했더니 어느 날 주지자리를 상좌에게 물려주었다는 소식이 들리고는 끝이었다. 대구 어느 토굴에서 누구도 만나지 않고 기도한다고 했다. 3년기도를 마치고 지금은 오대산 지장암에 들어가 대중을 외호하는 소임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최근 접했다.
스님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북적인다.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변함없이 대하며 말 보다는 행동으로 포근히 감싸는 스님, 다양한 재주를 가졌지만 그 재주를 내보이지 않고 안으로 영글어 가는 정안스님이 갑자기 보고싶다.
이 겨울, 서해에서 나는 맛있는 김 사들고 오대산에 다녀오고 싶다. 그리고 힘있어 보이는 정안스님의 눈빛을 만나고 싶다.
■세원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