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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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스님
어른 제대로 모시기 ‘대표적’
‘운문’하면 생각나는 스님

내가 처음 일진스님을 만난 것은 운문승가대학 입학 날이다. 그때 스님은 동국대를 졸업하고 최고의 경반인 <화엄경>의 중강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꽃꽂이, 붓글씨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그야말로 ‘운문’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어쩜 저리도 다재 다능한 스님이 계실까 할 정도로 그때 내 눈에 비친 일진스님은 참으로 고왔고 또 여성스러움 그대로였다.

운문승가대학장 명성스님이 그 많은 제자중 유독 일진스님을 더 아끼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진스님은 학교를 졸업하고 후학을 위해 운문사로 내려 온 뒤로 몸과 마음을 온통 바쳐 학장스님 곁에서 손발이 되어드리고 있다. 어른을 모신다는 것, 그리고 그 어른의 모든 면을 채워드린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스승을 하늘같이 받들고, 스승의 가르침을 한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스승을 모셨던 제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도 불쑥 스승의 방을 노크하여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뵈어도 되느냐고 여쭈어 보고 그리 하라고 하면 찾아뵙지만, 기다리라고 하면 문전에서 스승이 불러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뵙는 그 제자의 모습을 보고, 그 제자의 제자도 자신의 스승을 그렇게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제자를 가르친 모습인데 대우받고자 원한다고 모든 제자가 다 그 스승을 대우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제자 또한 제자에게 말보다도 손수 스승을 깍듯이 모셔 왔기 때문에 무언 중에 이루어진 교육일 것이다. 그런데 옛날 이야기가 아닌, 요즈음도 이런 스승과 제자가 존재하니 얼마나 본받을만한 이야기인가.

일진스님도 우리처럼 똑같은 학장스님의 제자이다. 허나 스승을 모시는 마음은 우리와 다르다. 강단에서 강의를 하여 스승에게 배운 학문을 전승시키는 것만이 스승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르고 실천하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제자들이 일정 기간의 교육을 마치고 자기의 본분을 찾아 떠날 때 스승의 가르침을 자기 생활 전부에 쏟아 부어 넣지 않는 것이 대부분 제자들의 습성이다. 나 홀로 배우고 닦아서 성장한 것으로 착각하며 망각하고 살기 일쑤인데 일진스님은 달랐다.

‘운문’을 떠나지 않고, 많은 후학들이 마음 편히 졸업을 하고 그리고 훗날 찾아가도 낯설지 않게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으면서, 스승 곁에서 스승이 가장 편하도록 그 뜻을 받들며 살아가고 있는, 후학들에게 산교육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운문인들은 말한다. 어쩌다 운문사에 가면 모두가 낯설고 어색한데 그래도 낯익은 일진스님이 학장스님 곁에서, 선·후배들을 기억하고 챙겨주니 참으로 고맙고 잠깐이나마 마음 편히 다녀 올 수 있다고.
일진스님은 늘 학장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도 한번도 그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루종일 운력을 하고, 강의를 하고, 힘든 일과를 보낸 날일지라도 한밤중에 용무가 있어 스님께서 찾으시면 모든 일 제쳐 놓고 스님 곁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아도 먼저 헤아리고 챙겨드린다. 도량을 손질하는 일, 학문을 연구하는 일, 그밖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학장스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큰 도우미’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개인 일을 게으름 피우지 않는다.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을 한다. 강의를 하면서 또 소임을 맡으면서 틈틈이 포교를 할 곳이 있으면 병원이든 군법당이든 어디든지 찾아다니고, 학인들에게 외전으로 일어를 가르친다. 또 사찰의 많은 행사에 직접 꽃꽂이도 한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운문의 도량에서 큰 대들보 역할로 운문의 많은 학인들을 보내고 맞아들이는 일에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일진 스님이 있기에 운문의 도량은 늘 잘 여물어져 있고, 언제 달려가도 어머니품속 같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내가 운문사를 떠나온 뒤로 일진스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열 손가락으로도 꼽히지 않지만 함께 살면서 느낀 정이 늘 내 가슴에 살아있기 때문에 항상 그리워하는 스님이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묻어야지 그것을 꺼내어 모양을 다듬고 수다스럽게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수행자가 살아가는 모습일 터지만, 참으로 그리운 날 나는 일상을 떨쳐버리고 그 모양을 만들기 위해 ‘운문’으로 달려갈지도 모르겠다.

‘운문’에 가면 나를 기억해주고,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도록 배려해 줄 나의 소중한 선배님이 늘 계시다는 것 그 자체 만으로도 얼마나 흐뭇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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