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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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원스님
천방산 기슭서 무소유 삶
고아들 돌보며 수행열심

충남 예산읍내를 거쳐 대술면 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천방산이 나온다. 그 천방산 산줄기를 따라 큰 저수지를 한참 돌아가보면 천방사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 그 암자에 승원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승원 스님은 나이로는 나보다 한참 연배이지만 강원생활을 함께 한 도반이다. 강원을 졸업하거나 학교를 졸업하면 스님들도 동창 모임을 갖는다. 스님은 한번 그 모임에 왔다가 나이 어린 스님이 나이 많은 스님에게 경우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는 이곳은 내가 올 자리가 아니라고 훨훨 떨쳐 버리고는 그후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여러 도반들이 함께 하자고 여러번 권유를 했지만 스님은 ‘홀로 수행’에 힘을 다 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지라 어쩌다 스님을 찾아간다. 그리곤 천방산 기슭에서 침묵을 배우고 검소를 배우고 참나 주시함을 배우고 돌아 온다. 스님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모두 손수 하고 있다.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고... 스님에게는 가능한 시은을 덜 지어 갈려고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곳에는 현대의 휘황찬란한 물질 문명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스님의 손은 거칠다 못해 손톱이 다 부러질 정도이다.

내가 대중처소로 가기를 몇차례 권유했지만 시은이 무섭다고 했다. 받아 먹기만 하고 제대로 정진을 못하면 마음이 더 무겁고 몸이 더 무거우니 내 몸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내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현대생활이 주는 편안함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스님은 그곳 천방사에서 은사스님을 떠나 보내야 했다. 또 한분의 노스님도 모시고 살았는데 그분의 장례도 손수 치러야 했다. 그리고 속가로는 언니고 절집으로는 사형의 인연을 맺은 스님마저 손수 장례를 치르는 아픔을 견디면서, 어쩌면 허망함과 무상함을 더 뼈저리게 느끼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또 부모 없는 고아들을 몇 명 데려다가 키웠는데 그 아이들마저 자기들 살 길 찾아 떠나고자 했을 때 스님은 아무 말 없이 부모처럼 방을 얻어 주고, 직장을 구해 주는 등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채비를 해 주었다. 좁은 내 소견으로 “그렇게까지 한다고 저 아이들이 고마움을 알까?” 했을 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아이들의 집은 바로 이 천방사야. 내가 해주지 않으면 누가 해 주겠어. 그래도 부처님 밥 먹고 자랐는데 결혼을 하겠다면 결혼도 시켜주어야 해. 모든 것이 억지로는 안되고 그 업력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데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을 인연이 안된다면 어떻게 하나. 어디 가든 부처님뜻으로 살면서 마음 하나 잘 쓰면 되겠지” 했다. 아이들에게 부처님이 뵙고 싶을 때는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찾아 오라, 천방사는 다 너희들의 집이기에 기대고 쉴 수 있는곳이라고 단단히 일러 주곤 했다.

사실 절집은 ‘숨은 고아원’이다. 또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식처럼 사랑해주고 보듬어 주면서 아이들을 키운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모두 머리를 깎고 출가사문의 길을 가준다면 대성공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하나 둘 스님곁을 떠날 때 그 떠나는 아이들을 서운해 하고, 많이도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아왔다. 떠난 그 아이들은 다시 절집으로 오지도, 가지도 않는 모습을 보아온 터라, 미련없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승원 스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보시행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말로는 누구든지 다 알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문제가 급박하게 닥쳤을 때는 그 모든 것을 망각하고 자기의 이익 쪽으로만 눈을 돌리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간사한 마음이 아닌가, 가끔은 주위에서 아이들을 키워보라고 내게 권유하지만 나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나는 승원 스님처럼 진정한 보시행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승원 스님이 정진하는 천방사는 어쩌다 찾아 오는 반연들에게 기도 법을 알려 주는 정도고 법회를 하거나 불사를 거대하게 하지 않는다. 청빈 그대로이다. 어쩌다 재라도 들어오면 스님은 참으로 부담스러워 한다. 그 조그마한 토굴은 찾아가고 찾아 오는 이가 드문 골짜기에 있지만 스님은 그곳이 수행자에게 극락이고 열반의 언덕이라고 누누히 말한다. 생활권이 편안한 대중이나 도반들에게 기대어 살려고 하지 않는 승원스님, 나는 때로 번잡하고 분주한 내 생활에 지쳐 기운을 잃을 때 승원 스님을 찾아가 무소유의 가치를 배우고 ‘더 많이 비우기 작업’을 하지만,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수행이 되는 것처럼 편하게 살아 가는 나의 초라함이 스님 앞에서는 더 크게 느껴진다.

스님은 물질에 연연해 하지 않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가꾸며, 청빈을 즐기면서 사는 스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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