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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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스님
붓글씨 솜씨 숨은 실력자
언제나 해맑은 미소

먹향기가 그득한 연꽃 한 송이가 통영에서 여기 보령까지 배달되었다.

“그 얼마만큼의 거리로 살던 함께 천년이라도 갈 수 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글귀와 함께 그 그림을 내 방, 내 눈 높이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문득문득 그리워하면서 그 작품을 내내 감상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에 있는 말과 글을 승화시켜 표현하는 것을 일러 ‘작품’이라고도 하고 창작이라고도 한다.

그 작품의 값어치는 정서를 공유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고귀한 매력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글과 작품을 보냈다고 할지라도 느끼는 감성이 없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읽은 사람에게, 아니 어떤 작품을 함께 감상할 경우 꼭 그 느낌을 물어보는 것도 얼마만큼 나와 함께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 공감을 나눌 수 있을 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심을 느끼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감히 넘나들 수 있을 것이다.

지행스님, 남도의 끝자락 통영에서 먹향에 취해 붓을 놓지않고 살아가고 있는 스님이다. 붓을 놓지않고 정진하고 있지만 세간에 떠들석하게 이름을 내걸고 전시회를 하거나 그룹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까지 본인의 이름을 내놓지는 않는, 숨은 실력가이다. 어쩌다 한번씩, 아니 해가 바뀌게 되면 연하장용으로 글씨를 보내주는데 그 글씨는 이름을 내걸고 요란하게 거듭 전시회를 하고 있는 스님들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올해는 언제 또 습득을 했는지 글씨가 아닌 그림으로 안부를 전해왔다. 스님을 생각하면 먹향기 이전 코스모스 꽃을 연상하게 된다. 내가 스님께 지어준 또 하나의 이름이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운문의 도량에서 내가 그렇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만큼 스님은 순박하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맑은 심성을 가지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 어릴 때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도 스님은 그냥 그 마음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어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고, 내 몸에 꿈틀거리는 탁한 기운들이 쏴 하고 빠져나가는 그러한 느낌을 받는다.

지행스님과 나는, 두사람 만이 간직하고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강원 때의 일이다. 화엄경 졸업반 때는 졸업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때 나는 여행비를 낼 수가 없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스님들에게 도움을 청할수도 있었지만 왠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나의 불편한 마음을 알았는지 어느날 지행스님이 내게 말했다. 그렇게 고민할 것 없이 함께 탁발을 나가 보자고. 그때 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조그마한 절의 주지로 계셨기 때문에 학비 등 용돈을 타 쓰기 때문에 별 불편이 없이 살고 있었지만 나의 은사스님은 선객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살아가야 할 그런 환경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헤아리고 탁발을 권유하고 또 함께 동행해 주었던 지행스님. 나는 그때 지행스님과 더불어 대구 시장통을 누비면서 최초이지 마지막으로 한 바루 가득 탁발을 하여 그 덕분에 졸업여행 뿐 아니라 마지막 강원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탁발에 관한 추억은 지행스님과 나만이 아는 일이지 아무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졸업할 무렵도 그랬다. 짐 하나 갖다 놓을 곳 없는 내게 스스럼없이 은사스님의 조그마한 암자로 안내해 준 일도 잊을 수 없다. 그때의 힘든 기억들이 어느만큼 나이를 먹고 나니 정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추억이 되고 말았지만 그 덕분에 지행스님은 내 마음속 깊숙이에 자리하게 되었다.

요즈음 젊은 스님들 대부분은 구속을 싫어한다. 그 구속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형식적인 구속을 싫어하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은사스님이나 어른스님들을 모시고 사는 것을 꺼려한다. 그런데도 지행스님은 노령의 은사스님을 모시기 위해 다년간의 수좌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사스님이 계시는 사찰로 들어가 본인과는 맞지 않다고(살림하는 일이) 하면서도 열심히 맞추어 살고 있다. 열심히 포교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있으며 틈틈이 자기만이 창출하고 표현해 가는 작품생활에도 게으름이 없다.

삶의 굴곡을 내 업력이라고 담담히 받아 삭히면서 하루하루의 수행을 다시 점검하는 도반 지행스님이 사는 통영의 푸른 바다, 그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는 한, 아무리 세월이 변하고 탁한 공기가 우리들을 에워 쌀지라도 스님의 해맑는 미소는 그득 피어 올라 그것을 정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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