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오로지 참선수행만
‘출가’의미 일깨워주는 스님
‘출가’.
단순히 정들었던 집과 가족을 버린 것으로, 또 삭발염의한 것으로 대 만족을 삼는다면 이것은 진정한 ‘출가’라고 할 수 없다.
출가란, 고정화된 관념과 익혀온 많은 습들을 뚫고 자신을 자신답게 드러내 놓으면서 대 자유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삭발을 할 때마다 진정한 출가의 의미, 집을 떠나온 이유를 생각하며 삭발한 머리를 만져 보고 또 신심을 다져 올곧은 수행자의 자세로 정진하라고 일깨워주는 스님들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자기 자신을 자신답게 드러내 놓는 일은 쉬운 듯 하면서 참으로 어렵다. 많은 허구의 집에서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경우가 빈번함은 물질의 풍요로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 자유의 길이 누구앞에나 놓여있지만 수행의 길목에서 많이도 번민함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굴레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 자기자신을 겉치레의 도구에 합류시키지 않고 담담히 자유의 길을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출가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스님이 있다. 나는 그 스님을 ‘바람’스님이라고 부른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며 떠나고 싶을 때는 주저없이 휑 하니 떠나는 스님이기 때문이다.
스님의 전 재산이라고는 걸망 하나가 전부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더 만들어 가지 않는다. 때론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자신에게 철저하다. 그러나 남에게는 관대하고 망상의 집을 결코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부터 출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함은 많이 만들어 놓은 반연 때문이었다고 그 반연들에게 진 빚을 어느 정도 갚고나면 진정한 출가의 길을 가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는 초일스님. 스님은 출가하는 그 날까지 결코 자신의 꿈을 놓지 않았으며 3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출가를 해 20년간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참선수행만 고집하며 변함없이 살아오고 있다.
늦은 출가였지만 그 늦음을 늦다고 표현하지 않고 ‘이른’이라고 스스로 표현하면서 형식적인 무소유가 아닌, 참 무소유를 빚어내고 있는 숨은 수행자이다. 비쩍 마른 몸매에 피부엔 윤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초라한 행색이지만 스님의 눈빛은 그 어떤 것도 녹일 수 있을 만큼 형형하니 살아 있다.
스님이 기거하는 토굴은 말 그대로 ‘토굴’이다. 요즘 일부 스님들이 대중을 떠나 나름대로 수행을 하겠다고 토굴을 만들어서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갖추어 놓고 “나는 토굴에서 정진하는 수좌” 라고 말하는, 기름기 흐르는 그런 토굴이 아니다.
방은 딱 한 칸이다. 따로 부엌도 없다. 왜냐하면 초일 스님은 대부분을 생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생식을 못 하는 이들이 찾아가면 정말 간단히 먹을 거리를 해결해 준다. 방 구석에 놓인 휴대용 가스버너로 끓인 된장국에 김과 간장이면 밥 한 그릇을 비울 수 있도록 해준다. 빈 그릇들은 흐르는 냇가에 가져가서 씻으면 그만이고…
살던 토굴을 떠날 때도 간단하다. 소지품 전부를 걸망 하나에 차곡차곡 넣고 그 나머지는 다음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고 간다. 물건이 많으면 떠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고, 또 좋은 물건이 있으면 그 물건에 집착이 가서 마음을 거기에 다 빼앗기고 마는 물욕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라며, 물건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다.
스님은 출가는 대중처소에서 했지만 이후는 대중처소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완전 토굴형’ 스님이다. 강원이나 선원에 얼굴을 내민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행사에 동참하는 스님도 아니라 몇몇 도반 외에는 스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아는 도반이 도움을 좀 주고자 하면 어디론지 숨어버려 몇 해나 지나야 얼굴을 겨우 내민다.
누군가 어쩌다 보시금을 좀 넉넉하게라도 주게되면 초일 스님은 안절 부절이다. 그 돈을 어떻게 써야할 지 두려워하며 마침내 누군가에게 다 주어버리고는 그제서야 마음 편해한다. 그런 스님의 모습에 답답하다고 말하니, 답답하기 때문에 정진을 하지 답답하지 않고 이(利)에 밝으면 화두는 물 건너 가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비어있기 때문에 늘 자유로운 초일스님. 최소한의 시은으로 더 큰 자유로움을 만들어 가는 그 당당함이 이 시대 모두의 귀감이 되고 있지만 우린 그 귀감조차 흘려 보내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대중과 더불어 하지 않고 홀로이기를 고집하는 스님, 어쩌면 ‘괴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진정한 괴각’스님이 많을수록 우리 승단의 구도심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세원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