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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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스님
승가대 김포이전 앞장
면학분위기 쇄신 한몫

중앙승가대학은 한국불교계에서 스님들만 입학할 수 있는, 승려전문교육기관으로는 유일한 정규 대학이다. 오늘의 이 학교가 있기까지 조계종의 절대적인 지원과 의지가 있었고, 석주큰스님을 비롯한 종단과 학교의 수많은 분들의 원력과 헌신이 한데 어우러져 이룩한 성과이다. 서울 돈암동 보현사에서 79년도에 처음 개강한 이래 영화사, 개운사 시대를 거처 김포학사로 이전한 지금 20여년의 각고의 시간을 딛고 명실공히 승가교육의 전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앙승가대학’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석주 큰스님이다. 다음으로는 금정 스님과 문화부 종무실에 재직하던 이용부 전 종무관이다. 금정 스님은 중앙승가대에서 오랜 기간 재직하면서 기획국장 및 기획실장 소임을 보았다. 재직기간 동안에 대학 설립인가에서부터 지금의 김포학사 이전에 관한 일까지, 어느 하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다. ‘승가대학 설립인가 추진위원회’를 89년 2월 발족하였다. 그때까지 비인가 학교였던 중앙승가대학을 교육부로부터 정규대 인가를 받자는 의견이 종단 차원에서 집약되었다. 추진위의 실무책임을 금정스님과 내가 맡게되었다. 금정스님과 나는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17층에 있는 교육부 대학행정과를 다짜고짜 찾아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동안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더니 “스님들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묻는 사람이 있었다. “대학행정과장님을 뵈러왔습니다” 했더니 그는 본인이 대학행정과장이라면서 무슨 용무로 왔느냐고 다시 물었다. 우리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운영하는 중앙승가대학에서 왔는데, 이 대학을 교육부로부터 인가받으러 왔다고 했다. “대학 인가요!!, 어디에서요??” 하고 의아해하며 또 물었다. 대학이 서울 안암동에 있는데 그 자리에서 인가받으려 한다 고 말하자 그분의 답이 서울에서는 대학인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도권의 인구정책과 균형발전을 위하여 서울, 경기 지역을 권역별로 나누어서 ‘수도권정비계획법’을 시행하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이 법으로 개발제한하고 있어서 대학설립인가를 불허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그와 관련한 수많은 법적인 문제들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또한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그만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금정스님의 탁월한 능력과 그 원력의 절실함이 남다른 것을 그때부터 보게되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승가교육의 체계확립과 위상정립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고, 그 이후에는 어떠한 소임도 보지 말고 미련 또한 갖지 말자고 했다. 그날부터 조계종총무원으로 출근하여 정부청사인 교육부와 문화부 종무실에 하루에도 수차례 찾아가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고심했다. 우선 학교법인 설립에 총력을 기울였다. 관련법의 해결을 위하여 국회와 과천청사, 서울시청에도 수없이 다녔다. 관련된 정부 부서와 협의하는데 피를 말렸고, 제출할 서류를 만드는데 거의 날마다 밤을 새웠다. 당시 학교에는 전동타자기 하나가 없었다. 수동타자기로 서류 한질 만들려면 밤을 새기 일쑤였다. 보다못한 내가 전동타자기 한 대를 화주해 왔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마음깊이 감사드릴 분이 있다. 당시 문화부종무실 종무관이었던 이용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설립인가에서부터 김포학사로 이전승인까지 이분께서 삼분의 일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89년 7월 11일에 취득한 우리는 오히려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법인대학인가를 해준다는 것이다. 대학인가 절차가 몇 단계로 되어있는 것도 그렇지만 정규대학설립 후 3년기간 동안에 법적 요건을 갖추어 학사건립과 운동장 확보를 하고 나면 심사 후, 4년제 대학에 준하는 각종 학교로 인가취득 후 다시 학력인정 승인을 받아야하며 정규대학승격은 이와는 다른 별개 문제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외적으로는 수도권정비계획법과 그 관련법 개정 문제였고, 내적으로는 설립자금확보와 운동장 확보였다. 90년 2월 27일 각종 학교인가 취득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 금정스님과 나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과로로 위경련을 자주 했다. 한 달에서 보름사이에 번갈아 가면서 위경련을 했으나 금정스님의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나는 건강 때문에 2년 가량 학교를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동안에 학교의 면모를 갖추고 면학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한 금정스님의 의지와 원력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부속시설인 도서관건립, 신문사개설, 대학학력인정, 복지관 위탁관리, 보육교사 교육원 설치, 각종 학술연구소 개설, 불전국역연수원 개설 등등 모든 것들이 그의 머리에서 기획되어 설치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업적은 김포학사로의 이전계획이다. 수많은 문제와 수많은 반대, 수많은 음해를 오직 원력 하나로 극복하고 이전승인을 취득했다. 그는 지금 히말라야의 산기슭에서 고행정진하고 있다.

■정취암 주지
200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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