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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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타스님
이·사 두루 밝아 소임 철저
안거 회향 5백명 대중공양

해인사에는 산내 암자가 16개 있다. 그 중에 청량사는 해인사 경내에 있지 않고 매화산과 접해있는 천불산(일명 남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산기슭에 버려진 듯 폐사 직전의 초라한 암자였는데, 원타 스님이 주지를 하면서 중창의 원력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일신하게 되었다. 짜임새 있는 가람의 규모나 불사의 내용으로 볼 때 원타 스님이 아닌 그 누구도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원타 스님은 평소 매우 과묵하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두루 살펴 챙기는 모습이 마치 맏형 같다. 스님은 수좌 생활을 하면서도 종단과 해인사의 어려운 사정을 들어 크고 작은 소임을 맡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사에 두루 밝다.

해인사에서는 매년 2번, 산중 대중들이 하안거와 동안거 기간에 용맹정진을 한다. 7일동안 잠을 전혀 자지 않고 용맹정진을 하는데 그 분위기가 살벌할 정도로 엄하다. 어느 산중이던 안거 기간에는 용맹정진을 하지만 특히 해인사는 전국 사찰 중에서 대중이 가장 많기 때문에 더욱 활기가 있다. 성철 큰스님께서 살아 계실 때는 학인들과 신참들은 용맹정진 시작전날 3000배 절을 한 후 용맹정진에 합류하게 했다. 바늘 끝만 스쳐도 도 통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한껏 고조된 분위기는 온 도량을 뜨겁게 달구게 된다. 용맹정진은 행자에서부터 방장스님에 이르기까지 산중의 모든 대중이 함께 한다. 행자는 후원에서 하고 정진대중은 좌복 위에서, 소임자들은 소임처에서 한다. 이 기간동안에 다리 펴고 편히 누워 자는 사람은 대중 아니기를 각오해야 한다. 예전에 어린 사미승이 용맹정진하던 3일째 되는 날 홀연히 사라졌다. 짐 싸 가지고 도망간 것도 아닌데 도대체 행방이 묘연했다. 용맹정진 중이라 달리 곳곳을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나타나기만 하면 참회시킨 후 산문 출송을 시키려고 별렀다. 용맹정진이 다 끝나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급기야는 대중들이 온 도량을 샅샅이 뒤지며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미승이 쌀 뒤주 안에서 5일 동안 깨지도 않고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달랑 안아다 조실 스님 방에 편히 재웠다.

이렇게 7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고 나서 회향하는 날은 모든 대중들이 산행을 한다. 산행코스는 해인사에서 출발하여 신부락을 거쳐 남산을 타고 가서 청량사에 도착 후 점심공양을 한다. 점심공양 후 큰절로 돌아오는 팀과 다시 남산을 거쳐 가조에 있는 고견사로 넘어가는 팀으로 나누게된다. 청량사의 대중공양은 특별하다. 원타 스님은 해마다 2차례 씩 500여 대중의 용맹정진 회향 대중공양을 흔연한 마음으로 며칠씩 준비하여 차려놓고 대중들을 지극히 외호한다. 원타 스님이 다른 곳의 선원에 결제하러 가서 사중에 없을 경우에도 이 대중공양 만큼은 꼭 챙긴다. 산중에 살다보면 대중공양을 가끔씩 내는 것이 생소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원타 스님이 용맹정진 회향 때 내는 대중공양은 특별하다는 생각을 늘 하게된다. 그 준비 과정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것이 매우 정성스럽고 지극하다. 결코 겉치레나 체면치레로 하는 공양이 아니다. 부처님께 수자타가 유미죽 공양을 올리던 것 같은,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이 배어 있고 느낌이 있는 공양이다.

원타 스님은 출가이래 지금껏 좌복을 떠나본 적이 없는 수좌이면서도 종단과 해인사의 소임을 몇 차례 본적이 있다. 해인사에서 총무와 재무 소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재무소임을 보다 한철이 지난 후 간단한 메모 한 장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내용인즉 “숫자만 보면 머리가 띵해지고 골이 아파서 더 이상 재무소임을 볼 수가 없다. 이제 사중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으니 다시 좌복 위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후 또 다시 마지못해 총무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두 철이 지난 후 극구 소임을 사양해도 뿌리치기가 어렵자 어느날 훌쩍 인도로 떠나 부다가야에서 정진을 하다가 그 이듬해 돌아왔다. 소임이나 직위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소임을 맡게되면 종단의 상황과 사중의 대소사 일을 세밀하게 살펴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남다르다. 흔히 재무나 총무 같은 소임을 맡게되면 데데해지고 그만두기 싫어하기 일쑤인데, 원타 스님이 어느날 소임을 버리고 정진을 하기 위하여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성철 큰스님 문하에 입문하여 그분의 칼날 같은 정진 일념으로 훈습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도반들이 어떠한 사안으로 옥신각신 논쟁을 하는 때에는 한참동안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제 그만 치아라. 중이 무신 놈의 이론이 그래 번다하노” 나무라며 말리고는 한다. 수행자로서의 정진 이외의 세속적인 삶의 가치를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수좌, 그가 이번 결제부터 조계종립 선원인 문경 봉암사 주지를 맡아 수좌들의 정진생활을 외호하게 되었다. 늘 솔향기 같은 수행자의 담백함과 진솔함을 지닌 원타 스님이 있기에 봉암사의 솔바람소리는 더욱 청아할 것이다.

■정취암 한주
2001-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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