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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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스님의 스님이야기】불굴스님(중)
4년 행자시절 갖은 고생
어떤 일이든 겁내지 않아

불굴스님의 행자시절 이야기는 정말 눈물이 난다. 선산 도리사에서 13살 되던 해에 행자생활을 시작하여 고성 건봉사에서 수계할 때까지, 그 4년의 행자 시절은 스님에게는 보릿고개의 기억처럼 가슴에 남아 있다. 흔히 행자시절은 중노릇의 든든한 밑천인 만큼 고생스럽다고 말하지만, 불굴스님의 행자 생활은 그 고생이 마치 혹독하고 가난한 순례자의 역정 같다. 가장 신심 나던 행자시절은 선산 도리사에서 공양주 노릇하던 때였다고 말씀하신다. 당시 율사(律師)로 존경받던 종수 노스님을 모시고 행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노스님의 덕화와 가르침을 가까이서 배울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밥 짓고 청소하는 일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단다. 노스님 또한 그런 어린 행자를 무척 귀여워하시고 잘 보살펴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종수 노스님 밥에서 메뚜기 한 마리가 발견되는 일이 생겼다. 어린 공양주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분명 밥을 솥에서 풀 때에도 이상이 없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메뚜기 한 마리가 밥 속에 으깨지지도 않고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밥을 지은 어린 행자는 대중들에게 눈물이 날 정도로 혼이 나고 꾸지람을 들었지만 종수 노스님은 껄껄 웃으시며 그 일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어린 행자는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짐을 꾸리고 그 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노스님께 폐를 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어린 공양주 시절을 회상하면 목이 메인다고 하신다.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었던 노스님께 인사도 올리지 못하고 산을 내려올 때의 그 심정은 정든 집을 떠나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눈물이 앞을 가려 한참을 절 아래에 앉아 있었단다. 아마 그 시절 그 어린 행자를 시기한 동료 행자가 몰래 메뚜기를 밥 속에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불굴스님은 또 주왕산 너머 청량산 깊은 암자에서 숯장사 하던 행자시절을 잊지 못한다. 긴 행자시절 가운데 가장 힘들고 배고팠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청량산의 그 암자는 법당을 새로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고 있었다. 그래서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무엇보다 그 암자에서는 숯을 구워 양식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 불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행자 한 사람은 일꾼이나 다름없었다. 아침 먹고 산에 올라가 숯 만들 나무를 베어 놓고 내려오면 하루해가 저물던 그 때, 스님은 보리밥 한 그릇 먹고 그 힘든 일을 했다. 숯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30리 길을 걸어 장에 내다 팔 때도 있었다. 어쩌다 소나기라도 만나면 얼굴은 물론 바지까지 시꺼먼 숯 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숯을 팔고 빈 지게를 지고 그 먼 암자까지 돌아 올 때는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나서 고갯마루에 서서 어머니를 불렀단다. 초등학교에 가고 올 때면 꼭 절 마당을 지나게 되었는데, 스님들의 모습이 참 좋았다. 그래서 스님이 되겠다고 나선 길이 어느새 고생길이 되었으니, 엄마 생각이 절로 날 만도 했을 것이다. 그 암자의 주지스님이 일만 시키는 것이 미안했던지 공부할 수 있는 스님을 소개해 줄 때까지 숯장사 행자로 줄곧 있었다.

청량산 암자에서의 행자생활은 불굴 스님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혼자 살 수 있는 자신감을 배우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스님은 남에게 일을 잘 맡기지 않는다. 뚜닥뚜닥 망치질을 하면 움막 같은 집이 지어지고, 쓱싹 쓱싹 톱질을 하면 땔감이 될만한 나무 몇 짐이 금방 만들어진다. 아직도 힘이 장정 못지 않다. 어쩌다 젊은 우리가 도울라치면, 스님의 일손 앞에서는 아이 놀음밖에 안 된다. 지금 살고 계신 곳도 7할은 스님이 직접 고치고 지은 절이다. 일하는 요령이 생기고 일 앞에서 겁내지 않는 것, 이 모두가 청량산 암자의 행자시절 덕분이라고 하신다. 또 스님은 강원도 낙산사에서도 행자시절을 보냈다. 그 옛날 신라의 도의선사가 공부자리를 찾아 강원도까지 북행북(北行北) 하였듯이, 도리사에서 시작된 스님의 행자시절도 마치 구법의 일정 같아서 흥미롭다. 당시 낙산사는 대처승이 주지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추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추운 겨울 속옷도 입지 않고 얇은 나일론 바지 하나로 긴 겨울을 지냈고, 주지스님 요강을 비울라치면 손이 요강에 쩍쩍 달라붙을 지경이었단다. 지금도 겨울이 되면 그 당시 이야기가 단골 메뉴다. 그 만큼 오래 오래 지워지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정월에 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는 부푼 마음에 낙산사에서의 그 겨울을 춥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정월이 되자, ‘중 될 자격이 없다’ 면서 주지스님이 계를 주지 않았단다. 그 때의 낙담은 어린 나이에 큰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중 되는 일이 그토록 힘들었던 불굴스님. 스님은 17살 때인 지난 67년 건봉사에서 수계를 받고 비로소 훤출한 출가 사문이 되었다. 그 멀고 긴 행자시절 얘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만나는 여행 같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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