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헌옷…“옹색해 보이지 않는다”
살아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삶의 위안이며 등불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향산(香山) 스님은 세속의 깨복쟁이 친구 같은 도반이다. 그를 찾아 갈 때마다 둘이서 팔베개를 하고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헤어지는 일이 또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를 만나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는 기분이 든다. 걸망 지고 홀로 떠도는 삶이어도 결코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는 용기가 생긴다. 중노릇 십 년을 넘기면 비로소 도반의 정을 안다더니, 내가 지금 그런가보다. 요즘 들어 도반의 조그만 관심과 잔잔한 손길에도 울컥 가슴이 메어진다.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 나는 크게 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간병실에 누워 이불을 덮어 쓴 채 하루 종일 오한에 시달리다가 해질녘에야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깨어보니 옷은 후줄근하게 다 젖어 있었고 누군가가 내 머리맡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는 내가 잠을 자는 동안 줄곧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향산 스님이다. 그는 그때 간병(看病)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환자를 위해 죽을 나르고 약을 지어오는 등의 간병인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다음날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 그 때 나는 어렴풋이 도반의 정 같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소한 정이 수행 길에서 얼마만큼의 위안과 힘이 된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 일을 그는 까맣게 잊고 지내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두고두고 그 손길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일로 인해 아직도 나는 수행길이 지치고 힘들면 그를 찾아 나그네의 시름을 달래고 정을 나누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 때 향산 스님은 오래된 누비옷을 입고 있었다. 옷이 낡아서 군데군데 천을 덧대어 기운 곳이 더 많았던 옷이었다. 은사 스님이 입던 옷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껏 그가 새 옷 입는 걸 보지 못했다. 항상 누군가가 입던 헌 옷을 다시 입고 다닌다. 그래서 그에게서 더러 옷맵시가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바지와 윗도리가 한 벌이 아니라서 작아서 달랑해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너무 커서 헐렁해 보이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옹색해 보이거나 초라해 보이지 않는 것이 스님의 또 다른 매력이다. 향산 스님을 보면,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지만 수행의 향기는 바람을 거스리지 않고 사방에 풍긴다는 경구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향산 스님은 참 재미있는 별명을 하나 가지고 있다. ‘심 목사’ 라는 별명이 그것인데, 부흥회 하는 목사처럼 막힘 없는 그의 언변 때문에 속가 성(姓)을 따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참 정연하고 해박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를 말할 때, 부처님의 십대제자인 부루나 존자를 닮았다고 한다. 부루나 존자는 상대방에게 자기 주장을 강요하기 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일단 인정하고 다음으로 종교심을 싹트게 하는 포교법을 구사하였다고 한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방적 자기 주장은 편견이나 아집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향산스님은 백점 짜리 포교사다. 그와 앉아 이야기해 보면 얼마나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가를 알 수 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전도사가 말을 붙여 오더란다. 그래서 당신의 말을 얼마든지 들어 주겠다고 하고, 묵묵히 들어주었다. 한시간 가량 말하던 전도사가 이제 다 끝났다고 일어서려 할 때 이번에는 스님이 그의 허리춤을 잡았다. 이제부터 자신의 말을 들어줄 차례 라며 그를 다시 앉히고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 때 스님은 내리지도 않고 역을 몇 바퀴 돌면서까지 부처님 말씀을 하였단다. 나중에는 그 전도사가 지쳤다는 듯이 슬그머니 지하철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때 스님도 같이 내려 그 사람 집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날 그 전도사에게서 다시는 스님들에게 전도하는 무례를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헤어졌다고 한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전도행위에 대한 스님 나름의 일침이었던 것이다. 강원을 졸업하고 스님은 오랫동안 미얀마에서 수행하였다. 동남아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몇 년 뒤 돌아왔을 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깡말라 있었지만 눈빛은 맑았다. 그는 보현보살의 십대원(十大願)중에 유독 상수불학원(常隨佛學願)을 좋아한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보현 보살의 서원이 이제는 그의 원력이 된 것 같다. 지금 향산스님은 법주사 강원의 강주(講主)를 맡고 있다. 일찍이 동국대학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던 스님이 학림(學林)으로 돌아가 경전을 강의하는 일은 결코 낯설지 않다. 이 시대의 휼륭한 부루나가 되기를 발원하고 또 발원한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