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불붙은듯’ 수행 깨우쳐
신령한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 그 계룡산에 정말 괴짜 스님이 한 분 계셨다. 그 스님이 목초 스님이다. 스님은 ‘심우정사’라는 토굴에서 정진중이었다. 학인의 눈에는 그냥 땡초(?)처럼 보일 뿐이었는데 어른 스님들은 목초 스님만 오면 아주 각별히 대하셨다. 목초 스님은 쌀이 떨어지면 동학사 마루에 빈 쌀자루를 던져놓고 훌쩍 마을로 내려가 버린다. 우린 아무 말 없이 쌀자루를 가득 채워놓는다. 해질 무렵 스님이 나타나 자루를 들고 올라가면 한 보름 동안은 뵐 수가 없다.
학인들 사이에선 그가 도인이라는 둥, 지금은 몰골이 저렇지만 예전엔 아주 눈 푸른 납자였다는 둥, 도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둥, 저렇게 한 번 들어가면 무문관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장좌불와를 한다는 둥, 정말 말들이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목초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날 우리들 중 몇은 호기심이 너무 많은 탓에 그 토굴에 가서 그가 도인인가 아닌지 알아보기로 했다. 토굴에 도착했을 땐 주변이 생각보다 너무 반듯하게 정리가 잘 돼 있어 놀랐다. 방문 앞에서 목초 스님을 부르자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햇살 때문에 눈살을 잔뜩 찌푸린 스님이 왜 왔느냐고 묻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가라는 뜻 같았다. 내가 혹시나 싶어 갖고온 라면 두 봉지를 꺼내 흔들자 스님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치더니 들어오란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 스님은 벽장에서 과자랑 사탕을 꺼내 먹으라고 우리 쪽으로 밀어놓고는 사탕을 오드득 오드득 깨물어 먹고 있었다. 라면을 먹다 벌떡 일어나더니 부처님을 홱 돌려놓고는 벽장 속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말없이 잡수셨다. 아니, 곳곳이 부처님 아니 계신 곳이 없건만 방안에 부처님을 돌려놓고 술 마신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는 우리 생각을 읽었다는 듯 “휴식중!” 이란다. 저 분이 마시는 술은 불법의 진리로 빚은 법주인가 한낱 곡차인가를 놓고 우리들은 오랫동안 옥신각신 했다. 법주냐, 곡차냐에 따라 그가 도인이냐 아니냐가 결정 나는 것처럼…
그날 계단 앞에서 벌겋게 취한 스님이 “여구두연(如求頭燃)! 여구두연!” 이라고 소리치셨다. 우리들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에 불이 붙으면 오직 불을 꺼야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는 것처럼 그렇게 정진하라는 뜻이리라. 궁금증으로 무슨 대답을 가져오지 않을까 기다렸던 이들에게 우리는 고개를 흔들어 버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가 도인이냐 아니냐는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머리에 불이 붙은 것을 알려준 것으로 족했다.
봄이 될 때까지 스님은 내려오지 않았다. 강사스님께서 걱정이 되어 토굴로 학인을 보냈다. 그 학인의 말이 신발은 있는데 대답이 없어 그냥 내려왔다고 했다. 그 학인은 창문구멍으로 들여다 보니 목초 스님은 면벽중이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산수유가 뽀송뽀송 피어나던 봄날, 내 방 앞에 쌀자루가 있었다. 원주스님에게 말하고 쌀을 담으러 자루를 열자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편지였다.
‘욱수좌, 지금 여구두연?’ 뜨끔했다. 얼른 주머니에 넣고 산으로 올라갔다. 조용한 바위에 앉아 그 편지를 보고 또 봤다. 뜨거운 것이 불뚝 솟았다 가라앉았다 했다. 선방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는 길목에서 목초 스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수처작주(隨處作主)!”하시는 게 아닌가. 난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어쩌면 저리도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실까. 지난 번 방자하게스리 스님이 수행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저울질하러 나타난 어린 녀석들을 보면서 얼마나 황당해 하셨을까 생각하니 죄송했다. 절에 들어가니 내일은 휴강이라며 울력복과 모자, 장갑을 챙겨서 아침 6시까지 법당 앞으로 모이라고 한다. 목초 스님이, 지난 겨울 어떤 시주자가 백만 원을 보시했는데 그걸로 몽땅 묘목을 사셔서는 꼭 학인들 손으로 심으라고 당부하고 가셨다고 했다.
나무를 심어라?!
천지의 기운이 어우러져 만물을 만들어 내고 만물은 길러진 뒤에야 완성되며 길러지지 않으면 병들게 된다. 이 때문에 선지식이 헤아려 이루고 도와서 바로잡는 소임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내겐 소나무 20여 묘목이 할당되었다. 호미를 들고 산에 올라갔다. 스님의 깊은 뜻을 가슴에 담아 심고 잘 가꾸리라 약속했다.
목초 스님은 그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도 내려오시지 않았다. 그 해 겨울, 바랑을 지고 구름처럼 떠나셨다고 하는데 그 후로 뵌 적이 없다. 그러나 계룡산 골짜기마다 자라고 있을 그 많은 나무들처럼 어디선가 ‘여구두연’ 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반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