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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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욱스님의 스님이야기】일초스님
늦은밤과 새벽 경읽는 소리


난해한 논서 강의 수필처럼



문득 계룡산에 가고 싶다. 그곳에 가면 빛나던 눈빛으로 또랑또랑하게 글을 읽던 내 도반들과 그윽한 미소를 지닌 강사스님을 뵈올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동학사 강원시절에 난 강사 일초(一超) 스님의 시자를 자원해 세 철을 살았다. 그 당시 전국의 강원에서 가장 알차고 깊이가 있는 강의를 하시기로 정평이 나 있으신 일초스님은 강사란 일상의 모든 삶이 경전 속에서 녹아 내릴 때라야 제대로 부처님말씀을 전할 수 있다며 항상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우선으로 하셨다. 그 분이 강의를 하시면 아주 난해한 논서들도 아름다운 수필처럼 가슴에 와 닿았고 편지글들은 마치 역사속 인물들이 우리에게 보낸 편지처럼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어느 때 보아도 스님 방엔 불이 켜져 있다. 그 때마다 낮고 고즈넉한 경읽는 소리가 어두운 밤길을 따라 퍼져나갔다. 나는 그 소리가 좋아서 염화실 마루에 앉아 졸면서도 일어설 줄 몰랐다. 사실 내가 스님의 시자를 살았던 것은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다. 강사스님 방에 있는 많은 경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반 수업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방의 모든 책들을 섭렵했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다른 책들을 읽고 싶은 욕망이 일어 나는 것이다. 그 당시 강원에서는 경전을 제외한 책은 외전이라 부르며 무조건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금은 도서관까지 훤출하니 지어 다양한 책들을 보며 공부할 수 있지만 20년 전엔 어림도 없었다. 몰래 읽다가 걸리면 무조건 정학이었다.


하루는 강당채 마루를 지나가다 보니 몇 명이 책상을 쌓아 놓은 곳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살그머니 다가가서 “뭐하는데?“ 갑자기 묻자,” 저리가라마. 난 또 입승스님인 줄 알았잖아.” 허둥 대는 그들 손에는 당시 신부님과의 슬픈 사랑을 주제로 세간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던 <가시나무새>라는 책이 표지가 벗겨진 채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들려져 있었다. “어, 소설책이네? 오랜만이다. 나도 좀 보자.” 겨우 졸라서 일주일 후에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 는 그 책을 들고 매일 책을 읽던 강사스님 방에 들어가 걸레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책읽기 삼매에 빠져 그만 강사스님이 들어오신 것도 몰랐다.


“원욱, 뭐 하는고?” 순간 나는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하필이면 소설책을 보다 들켰으니 정학은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보던 것 이리 가져오고 그만 나가봐라.” 시자실로 돌아와서도 마음이 어찌나 불안한지 그날 밤 잠을 못 이루었다.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시면 줄줄이 출처를 대야할 내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 때 시자실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강사스님이 부르셨다. “달이 좋다. 이리 나와 봐라. 공양간에 가서 양동이랑 바가지 가지고 나를 따라 오렴.” 동학사는 산골짜기에 있어서 골바람 때문에 겨울이 되면 몹시 추워 사람은 물론 숲도 전각들도 심지어는 시간마저 얼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바람이 몰아치는 이 추운 달밤에 나를 어쩌시려고 저러시나 싶어 눈물이 날 것만 같은데 뾰족한 수가 없으니 시키는 대로 개울가로 나갔다. 스님은 바짝 긴장한 나를 보고 웃으시면서 개울물을 퍼오라고 하셨다. 그 웃음에 나는 벌받는 게 아니구나 싶어 얼른 물을 길어왔다. 양동이 물을 받아든 스님은 갑자기 주지실 옆 작은 비탈길 아래로 쏟아 부우셨다. “이 추운 겨울에 공부하느라 애쓴다. 내 눈에 그 책이 뜨인게 달포쯤 되는데 아직도 돌아다니는 걸 보니 꽤나 심심한 모양이구나. 외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희가 아직 세속인연들을 다 털어내지 못한 마음자리를 가다듬게 하기 위함이야. 차라리 자연에서 즐기는 것을 하나 찾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구나. 학인 시절에 우리는 이곳에 물을 뿌려 밤새 얼리고 다음날 아침에 신나게 미끄럼 타고 놀았단다. 내일은 강의를 일찍 끝낼 터이니 한판 재미있게 놀아보거라. 탈 것으론 가마니가 제일 좋지.”


그 날밤 강사스님 하고 나는 개울에서 물을 퍼다 비탈에 계속 뿌렸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우리의 작업은 끝났고 때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양동이랑 바가지를 내 손에 쥐어주시고 책 많이 보면 눈 버린다며 걱정스런 눈빛을 남기고 가시는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침이 되자 눈 내린 비탈길을 곱게 쓸어 놓고 반 스님들이랑 가마니에 대여섯명씩 올라타고 신나게 미끄럼 타며 아이들처럼 웃고 놀았다. 그 웃음소리가 계곡을 타고 계룡산 굽이굽이 메아리 치는 게 듣기 좋다며 흐뭇해하시던 스님의 모습이 너무 그립다. 철없던 학인에게 꾸지람보다 따뜻한 마음을 주셨던 일초 스님은 동학사를 떠나셨지만 가끔 방송을 통해 깔끔한 강의를 들을 수 있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랜다.

■반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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